[명혜망 2007년 10월3일] 1999년 박해가 시작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이미 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오늘까지 정법은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각지로부터 수련생이 박해받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으니, 나는 이에 대해 비할 바 없이 큰 마음의 아픔을 느낀다. 도대체 무슨 원인이 조성한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이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마(魔)가 당신을 연공(煉功)하지 못하게 교란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런 연고가 없다면 또 그것이 이렇게 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상으로부터 사악의 교란을 제거해야 하며 반드시 법리상으로부터 분명해야 한다. 나는 사악의 박해는 흔히 동수의 모호하고 법리가 똑똑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많고 많은 현상들로 이점을 설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악이 박해할 때, 동수에게 수갑을 채워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고, 사부님 초상을 동수의 몸 아래에 펴 놓고서 사악이 말한다. “오줌을 누겠으면 네 사부의 초상에 눠라” 또 어떤 수련생이 한사코 전화하지 않으니 사악은 사부님 초상을 몰래 동수의 신발 바닥에 깔아 넣거나 심지어 동수의 바지속옷 안에 쑤셔 넣는다.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 초상이 이렇듯 모욕당하는걸 차마 볼 수 없어 그렇게 많은 혹형에도 굴복하지 않았지만 이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전화”되었다 .
이런 일이 왜 발생 할 수 있었는가? 사악은 우리의 어떤 마음을 겨냥해 왔는가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는가?
수련의 이 길에는 그 어떤 두려울 것이란 없지만 다만 누락이기만 하면 곧 정시해야 하며 오직 정시해야만 버릴 수 있다. 나의 동수여, 가족에 대한 정은 내려 놓을 수 있는데 사부님에 대한 사람의 정은 내려놓을 수 없단 말인가? 사부님은 우리가 사람의 정으로 사부님을 대하지 말기를 바라신다. 사부님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바른 믿음은 불성의 체현이며 비인간적인 정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옷을 몽땅 벗기우고 온갖 치욕을 다 받았는데 사람의 수치심, 창피심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사람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2》) 이 마음을 버리는데는 또 어떻단 말인가? 생사마저도 도외시 할 수 있으면 정기가 나올 것이니 사악은 간담이 서늘해 질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바깥에 있을 때 이 마음을 인식하고 버리지 못하고 한사코 사악의 검은 소굴에 들어가 박해를 받는가 하는 것이다. 바른대로 말해서 “두려움”이 글자이다. 바깥에서 비교적 안일할 때 허다한 마음이 폭로되어 나왔지만 사람의 “정상관념”이라 여기고, 사상 심층에서는 옳은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감히 타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람의 관념이 아무리 “정상”이라 해도 여전히 사람의 관념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에서 걸어나오려 한다. 어떠한 관념이든 상관없이 모두 마땅히 법으로 가늠해야 하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집착과 관념이 아니겠는가?
만약 집착이거나 관념이라면 곧 버려야 하며 격식이 없다. 만약 스스로 감히 버리지 못하고 감히 정시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제고하지 못할 뿐더러 아울러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줄지도 모르며 대법에 손해를 조성해주게 될 것이다. 사부님은 《시간과의 대화》 중에 분명하게 제출하셨다. ”그들은 언제나 사람과 비기고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기지만, 도리어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한다.” 동수여, 누구도 다 표준이 될 수 없으며 법만이 비로소 표준이다. 사실, 이런 “두려움”은 여러 곳에서 표현된다.
예를 든다면, 한 수련생은 자신이 사악에게 납치당한 후 어떻게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었고 정념으로 마귀굴을 뛰쳐나왔는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찾아 보았지만 무엇 때문에 도리어 나오지 못하였는가? 나가기 위한 집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박해받을 것이 두려워 자신의 집착을 찾아보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악에게 수련해주는 것인가? 박해를 위해 수련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 박해 시초의 어떤 수련생의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나는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줄곧 한 가지 법(法)을 당신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해가 아주 엄중할 때, 특히 2000년에, 중국 대륙의 수련생들이 사부에 대한 사악의 요언 날조 선전을 폭로할 때, 어떤 수련생이 말한 한 단락 말이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또 반드시 시정해야 할 인식이었다. 대마두(大魔頭)와 중공(中共)이 수련생에 대해, 너희들의 선생은 어떠어떠하게 돈이 있으며 북경과 장춘에서 어떠어떠한 호화로운 주택에서 살았으며 생활이 어떻게 사치스러웠다고 날조하였다. 그 때 중국에서 법을 전할 때 내 생활은 아주 간단하였다. 중국 대륙의 한 수련생이 말하기를, 우리 사부님은 가장 좋으시며 그렇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 사부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당시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웠으며, 나는 과거에 하세하여 사람을 구도한 신(神)의 당시 고달픔을 더욱 헤아릴 수가 있었다.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 (《미국 서부국제법회 설법》)
사실, 사악이 얼마나 소란을 피우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확고히 하고, 자신은 중생을 위하여 법을 위하여 왔다는 것을 알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너 사악이 어떻게 광기를 부리든 간에 나는 나대로 확고히 내 갈 길을 갈 것이며 나는 너같은 사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래 네가 나를 어쩔 셈이냐?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하나의 부동함이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압한다”(《미국 중부 법회 설법》). 만약 대법제자 모두가 청성하고 이지적이고, 큰 재난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악이 그래 무슨 풍랑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낡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역시 법이 만들었으며 똑같이 법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무법천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법의 제약 하에 있다. 법은 일체 생명에 대해 모두 요구가 있으며 대법제자에 대해서만 요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와서 요구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법에 부합되지 않을 때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청리해야 한다.
사실 사악이 한 일체를 대법은 진작 부정하였다. 대법의 자비와 위엄은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동수여, 우리에게 또 무슨 두려워할만한 것이 있는가? 대법은 무량한 중생을 만들었고, 구세력과 동등한 층차와 그것의 층차보다 높은 층차의 무량한 중생을 포함하여 구세력은 대법 앞에서는 제기할 가치마저 없다. 만일 사부님과 대법이 그것들을 자비로 대해주고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반드시 진작 깡그리 소멸되었을 것이다.
지금 머리를 돌려 이 일체를 다시 본다면, 일체는 과정 중의 전시에 불과할 따름이다. 박해 시초에 대법제자들이 여러 번 정부 부문에 청원을 가고 진상 편지를 쓰며 현수막을 든 것도 대법이 그런 낡은 생명을 자비롭게 대해주는 일종의 형식이었다. 패괴된 그런 생명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음에 따라 이미 도태로 끝장을 보기로 결정되었다. 대법제자가 걸어가는 길이 보기에는 물론 몹시 험난하다. 하지만, “정법은 필히 성공하고 대법제자는 필히 성공할 것이다.” (《2004년 미국 서부법회설법》)사실상 이 길 역시 하늘로 오르는 길이다.
동수들이여, 두려워 하지 말라. 세간의 표현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절대로 이런 가상에 미혹되지 말고, 우리는 뛰쳐 나와야 한다. 그 실질을 보면 그것은 이것으로 대법제자를 놀라게 하려는 것인데, 절대로 안될 일이다!
현 단계에서 인식한 것이므로 동수들께서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10월3일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10/3/1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