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7년 9월19일] 최근 며칠동안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나의 수련의 길에 세 가지 “자비”와 관계된 일을 안배하여 나더러 고비를 넘게 하였는데, 나는 자비에 대한 인식에 있어 일정한 승화가 있게 되었다.
한번은, 엄중한 병마 박해를 받은 노인 동수의 집에 이르니 바로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가 그녀의 두 팔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니 그녀의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온 몸은 솜처럼 나른하여 스스로 설 힘이 조금도 없어 두 발끝은 땅에 끌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불쌍한가! 참으로 갖은 마난을 다 겪는구나! 어제 그녀가 마난속에서 뛰쳐나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 도리어 이 모양이 되다니…… 사악은 정말 지독하구나. 정말 미워. 반드시 없애버려야겠어!’
발정념할 때 나는 아주 강경하고 아주 확고한 일념을 발하였는데, 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사악은 “멸하라 멸, 멸, 멸”이라는 의념이었다. “멸”자는 나의 의념 중에서 점점더 빼곡해지고 점점 더 중해져, 나는 온몸의 힘을 다하여 “멸”을 염하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멸”을 염하였고, 염하고 염하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발정념하면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라고 했어도 참지 못하고 나중엔 도리어 대성통곡을 하였다.
처음엔 이것이 자비지심의 표현인 줄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즉각 깨달았다. 이 자비심 중에는 강렬한 사람의 동정심과 복수심이 끼어 있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수련인의 방식과 수련인의 사상을 이용하여 문제를 사고해야 하며 절대로 속인의 사상으로 가서 문제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 동수 몸에서 발생한 일을 만약 속인의 사유로 한다면 그것은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일이며,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잘못 깨우쳐 잘못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일이 지난 후인 어느 가을날 저녁,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단체 법공부 하러 가는 도중 나는 무의식 중에 길 어귀에 앉아있는 노인, 80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를 보았는데 머리는 헝클어지고 손과 얼굴, 옷은 모두 더럽고 어수선 하였다. 움푹 패여들어간 양 볼엔 때 자국이 얼룩졌고 눈빛은 흐리멍텅하였다. 갑자기 이 노인이 방불히 돌아가신 나의 어머님 같았다. 저인 정말 불쌍하구나!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은전 몇 잎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때에야 그녀는 머리를 들고 의혹에 찬 눈길로 나를 주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여긴 추우니 저쪽에 가셔 빵이나 사드세요.” 그녀의 얼굴에 그제서야 웃음이 피어났고 나도 웃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저으며 작별했다.
이 일도 보건대는 자비 같았지만 사실 나는 아주 부끄럽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일을 한 기점이 틀린 것으로 부처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사적인 육친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또 하루가 지나 외지에 있는 사랑하는 작은 딸 시즈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 애가 평소의 사업, 학습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잔소리를 몇 마디 하였다. 그 애는 또 그녀의 아이의 생활, 학습에 대해 말했고, 내가 또 잔소리 몇 마디 하였더니 그녀가 발끈했다. “엄만 좀 좋은 말로 해주면 안돼?” 그러자 나도 화가 치밀었다. 딸이 되어서 엄마의 마음도 알아주지 못하다니… 나는 불쾌한 어조로 말하였다. “엄마가 되면 다 이런거야” 그랬어도 그 애는 개의치 않고 내일은 자기 생일이라고 응석 부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오, 나의 딸이 내일이면 곧 만 37살이 되는구나. 또 한 살 더 먹는구나. 생일을 축하한다.”라고 말하면서 수화기를 덜컥 놓았다.
수화기를 놓자 사부님의 말씀이 귓가에 울렸다. “대법제자는 어떠한 일을 하든 모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한다.” (《2002년 보스턴 법회 설법》) 나는 즉각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남을 생각하지 않았고, 더구나 안을 향해 찾아보지 않았으며,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나는 이번의 불유쾌한 책임을 주동적으로 져야 했다.
나는 즉각 수화기를 들고 딸애의 집에 전화를 했다. 전화벨이 오래도록 울려도 받는 사람이 없자 나는 풀이 죽어 수화기를 놓았다. 그 애가 나의 쌀쌀함으로 인하여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5분 후에 또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이 불안해지면서 날개라도 있으면 날아가서 그 애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나는 작은딸이 전화에서 발끈 한 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고험이며, 내가 혈육의 정을 담담하게 볼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가 안 움직이는가, 씬씽을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신 것이다. 내가 주동적으로 전화해도 받지 않는 것도 사부님의 안배로서 제자인 나로 하여금 괴롭고 초조한 심정 가운데서 제고하고 그리하여 승화하게 하셨던 것이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바로 받았다. 나는 딸애에게 나의 내심의 변화 과정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더니 그 애는 감동되어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사부님께 잘 감사드려야 하겠군요. 사실 전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웠어요……” 전화에서 들리는 딸의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 그 애는 목이 메였고 눈물을 머금은 격동된 심정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차례 모순은 이렇게 사라졌다.
세가지 작은 일이 지나갔다. 하지만 나의 수련의 길에서는 도리어 평범하지 않은 의의를 가진다. 마난속에 빠진 동수에 대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버리고 정념으로 지지해주어야 하며, 육친에 대해서는 혈육의 정을 버리고 자비로 심령을 정화시켜야 한다. 수련인은 곳곳에서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이해해주며, 도량이 넓고 너그러워야 한다. 시시로 안을 향해 찾아보며, 마음을 닦아야 하며, 자성(自省)하고 상서(祥和)로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길을 걸어가는 대법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자비로운 표현이다. 제자는 영원히 사부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둘 것이다. ”당신 지금의 토대에서 자비를 담론하는 건 실제적으로 정의 작용이다. 자비는 정이 아니다! 속인은 정이 있는 것이며 승화되어 올라간 다음 정이 없기에 당신은 비로소 무엇이 자비인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법륜법해》)
문장발표 : 2007년 9월1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9/19/1629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