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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기점을 전변하여 정체(整體)를 새롭게 인식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9월11일】 2007년 8월15일의 명혜망 문장 “사악의 간격을 타파하고 누락이 없는 정체를 형성”이라는 문장을 읽고 아주 깊은 감촉을 받았다. 나도 문장의 작가와 비슷한 경력이 있었다. 나의 경력을 결합하여 어떻게 수련의 기점을 전변하고 “정체”와 사악의 “간격”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한 것을 말하려고 한다.

박해가 발생한 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나는 대부분의 동수들과의 연계를 잃어버렸다. 한둘 알고 있는 동수도 내가 있는 도시에 살지 않았다. 문장의 작가는 몇몇 동수와는 연락할 수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철처한 “고독”에 빠져 있었다. 내가 법리에서 곤혹스럽고, 나의 신체가 “업력”의 습격을 받을 때, 불법(不法)으로 체포되었을 때, 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큰 난관에 부딪쳤을 때, 나는 동수들과 교류할 수 있기를 얼마나 희망했으며 나를 도와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던가? 그러나 매번 외지의 동수에게 전화로 도움을 바랄 때 그들은 항상 전화상의 교류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기실 이것은 당시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는 것도 거절하면서 나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다.

한번 또 한번의 도움을 바랬으나 매번 실패하여 화도 나고 고통스러웠으며 심지어 절망했다. 나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고 그런 화나고 원망하는 마음을 몇년 동안 버리지 못했다.

몇 년 간 단독으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연단의 과정에서 천천히 그런 옳지 못한 상태의 근원을 인식하였는데, 그것은 곧 우리 수련의 기점인 것이다. 사적인 기점에서의 수련은 얻으려는 것이고 남을 위하는 기점에서의 수련은 지불하는 것이다. 이것은 낡은 우주의 수련과 대법 수련의 본질적인 차별인 것이다. 머리를 돌려 보니 내가 어떠한 정황에서 수련생을 필요로 했던 것인가? 모두 자신이 마난과 실망의 상태에 있을 때였다. 자신이 법을 실증하고 중생구도를 잘 할때는 동수의 도움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주동적으로 기타 수련생을 도우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나도 다른 동수의 고충을 알지 못했고 내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얻으려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얻으려는 욕망이 만족을 얻지 못하자 자연히 화도 나고 원망도 했던 것이다. 구하려는 마음이 만족을 얻지 못할 때는 원망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구하려는 마음은 원망이 생기는 가장 좋은 토양인 것이다.

밀레라빠(密勒日巴, 교정자주 – 티베트 불교인 백교(白敎)의 창시자)는 중생의 죄악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 박사가 가져온 독약을 마신 후 “병태”가 나타났다. 그는 난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바란 것도 아니고 신통으로 병태를 전이시키지도 아니하고 자신이 감당하면서 동시에 “병태”를 이용해 자신을 모해한 그 박사를 구도했다. 우리의 존경하는 신성하고 위대하신 사부님의 지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중생을 구도하려고 어떠한 고통을 감당했는지? 얼마나 거대한 지불을 했는지? 우리는 친히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응당 신을 본받아 수련의 기점을 사(私)를 위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하는 방향으로 차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사(私)를 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신의 고통속에서 헤메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안으로 찾음”을 중시하지만 실제로는 온종일 자신의 고통속에서 소용돌이쳐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을 위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의 감수를 초월하고 심지어 사망의 무서운 공포도 초월하여 감수하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고통인 것이다. 남을 도와 고통에서 해탈되게 하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 고통을 해탈하는데로 도달하는 것이다.

사(私) 위하는 수련 기점은 곤란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과 외부환경에 의뢰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고 자신은 책임감을 포기하는 과정 중에서 자신에게 있어야 할 독립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남을 위하는 수련 기점은 반대로 자신이 남에게 책임지는 사상의 지배하에서 자신의 언행에 책임지고 자신의 수련에 책임지는 것이다. 전자의 표현은 구하는 것이고 후자의 표현은 지불하는 것이다.

곤란중에서 어떠한 사람(수련생을 포함)이든지 어떠한 일, 어떠한 요소에 기대하는 배후는 모두 그중에서 얻으려는 것이지 지불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를 위하는 수련의 기점은 낡은 우주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낡은 세력과 사악은 자연히 교란하고 파괴하는 이유가 있게 된다. 이리하면 마난은 끝도 없이 존재하고 자신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련의 기점을 점차적으로 사로부터 남을 위하는 대로 전변할 때 우리는 곧 눈앞의 마난에 가로 막히지 않고 곧 낡은 세력이 안배한 마난에서 끝도없이 자신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대신 신성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대체되고 눈앞의 마난도 곧 이런 신성한 책임감 앞에서는 자연적으로 소실될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중생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디 남아 있는 감정이나 시간이 있어 자신의 고통만 생각하겠는가?
우리는 꼭 지불해야하고 꼭 용감하게 감당해야 한다. 자신이 응당히 수련해야 할 것과 감당해야 할 부분을 기타 동수에게 밀어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기타 동수의 도움이 효과를 보더라도 역시 사부님과 대법의 무변 법리가 세간에서 우리를 구도하는 진실한 체현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공로를 동수의 것으로 생각하고 동수에 대하여 의뢰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법시기의 대법제자이므로 미래를 개척하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전체가 정체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전체 중의 개체 수련생은 같은 도리로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마난을 대하는가? 어떻게해서든지 법을 실증하고 중생구도의 원칙 하에서 곤경으로부터 걸어나와야 한다. 이 모든것은 모두 미래의 참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자기의 길을 바르게 걷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법을 실증하러 온 것이다. 문제에 부딪치면 우선 법을 찾아야지 어떠한 사람에게 바라거나 어떠한 요소 어떠한 외래 환경의 변화와 어떤 형식의 도움에 의지하면 안 된다. 만일 사부님과 대법이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희망하던지간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크게는 박해의 결속 작게는 개인의 마난에 있어서 우리가 의거해야 할 것은 사부님과 대법뿐이고 자신이 법에서 수련해낸 정념인 것이다. 이것이 이 몇 년 동안 자신이 점차적으로 한 발자국씩 수련의 기점을 전변하고 화나고 원망하는 상태에서 헤어나오면서 느낀 자신의 감수이다.

다른 방면으로 고독과 고통은 모두 사람의 감수이다. 자신의 모든 정력을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에 투입한다면 기실 다른 수련생을 접촉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감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난중에서 분별하기가 아주 어렵다. 아주 쉽게 이런 사람의 감수를 경솔하게 사악의 간격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응당히 수련해야 할 부분을 홀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망하는 마음의 뿌리를 없앤 것이아니라 수련생을 원망하는 마음을 사악을 원망하는데로 전변한 것이다. 마난이 근절되지 못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눈앞의 마난을 잊고 눈길을 멀리 넓혀 모든 생각을 가능하게 많이 효과적으로 광범위하게 중생을 구도하는 것에 투입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진정한 의의를 아는 것에로 간다면 점차적으로 “무사무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무사무아”는 마난에서 걸어나오는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사악의 간격에 대하여 내가 인정하는 것은 사악은 근본적으로 대법제자를 간격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역시 우리의 마음이 자신의 간격을 벌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동수와 간격이 없으면 어떤 때는 수련생이 자신을 배척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가 걸어온 경력으로 놓고 보면 내가 수련의 기점을 점차적으로 전변한 후 자신의 원망하는 마음도 연기같이 사라져버렸다. 돌이켜보면 다른 지방의 수련생이 당시에 나에 대했던 태도가 충분히 이해가 되며 또한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당시의 정황에서 나는 자신을 위하는 사적인 마음을 정시하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독립 작전”을 하게 하고 감히 지불하고 감당하게 하는 기회를 준 것이다. 평상시에 내가 외지 동수들과 아주 적게 연락하지만 우리 사이의 마음은 통하는 것이다. 대법이 우리의 이런 입자들을 한데로 연결시킨 것이고 이것은 사악이 어떻게 하여도 간격을 두지 못하는 것이다! 사악이 대법제자의 간격을 벌일 수 있다는 인식은 사악을 너무 높이 받들은 것이다. 사악을 절대로 그렇게 확대하여 그런정도의 위치에 놓지 말아야 하며, 대법제자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정체에 대한 나의 인식은 간단하게 표면적으로 수련자 사이에 접촉하는가 같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모이면 형태를 이룬다” 이것은 법을 실증하고 중생구도를 하는 것에 수요되는가를 보아야 하고 환경이 허락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대방향에서 이탈했을 때에는 모이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대법제자의 정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국내의 엄격한 환경중에서 가능하게 낡은 세력에게 틈을 줄 수 있고 정체가 박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교훈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들은 형식상에서 같이 있어야 정체라는 이 관념을 버려야 한다.

몇년래 나는 단독으로 법을 실증하면서 기타 동수들을 접촉하지 못했다. 나는 난 속에서 고독함도 느끼고 공허와 실망, 심지어 절망까지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종래로 정체를 떠났다는 느낌은 없었고 나와 정체에는 간격이 없었던 것이다. 명혜망의 문장을 나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다 보았다. 그것은 우리 대법제자의 가장 순정한 일면인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아주 많은 수익을 얻었다. 명혜망을 통하여 나는 자신이 정체 중의 입자인 것을 느끼고 종래로 수련생이 문장에서 말한 “나는 정체에서 배척당했다”는 감각이 없었다.

또 국내의 고압적인 환경 아래에서 제자간의 상호 접촉은 본래 힘든 것이고 접촉하는 기점을 응당히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곳에 두어야 한다. 적어도 응당히 우리의 정체를 원용하려는 희망으로 지불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나는 제고해야 한다” “나는 곤경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심태로 얻으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수련생마다 대법중의 한 입자라고 생각하고 법의 기점에서 행동하면 아무리 혼자 “입자로 분산된” 상태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정체의 일부분이고 정체를 이탈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 우리를 한데로 연결했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법만이 우리 대법제자들을 정체로 단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의에서의 정체(整體)인 것이다!

문장완성 : 2007년 9월10일
문장발표 : 2007년 9월11일
문장수정 : 2007년 9월11일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9/11/16246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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