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람의 관념을 개변하고 법에서 인식하다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8월 17일] 최근 몇 년 동안 수련의 길을 걸으며, 특히 사악이 대법을 박해한 이후 조성된 사악한 환경에서 수련하면서 어렵지 않았는가? 라고 회상해 보니, 가끔은 아주 확실하게 어려웠음을 알 수 있었다. 신체적으로 감당한 어려움뿐 아니라 법리가 뚜렷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제거하지 않아, 사람의 관념을 개변하지 않아 조성된 난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수련자의 각도에 서서 법에서 깨달아 생각하면 어떤 문제라도 아주 간단해지며 상대적으로 환경 또한 느슨해진다.

어떤 동수와 교류를 했더니 그는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많이 박해를 당한다고 했고, 또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엄중하게 박해를 당한다고 했다. 안전문제에서 여러 모로 주의한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시심, 환희심, 수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안전에 위험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을 개변하지 않아 조성된 것이다.

한 수련생은 99년부터 수련을 시작했는데, 그가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악은 광범위하게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법제자들이 막 진상을 시작했을 때 그 또한 곧장 자료점 일에 참여하여 자료를 전달하거나 자료를 구입하기도 했으며, 많은 동수들이 그의 집에 다녀가기도 했다. 나중에 일부 수련생이 사악에게 납치를 당했고, 어떤 개별적인 수련생은 크게 굽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수련생은 자신이 연루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매일 큰 보따리와 작은 보따리를 들고 오갔다. 가두 주민 위원회에서도 모두 그의 가족에게 “나중에 그가 왕래할 때는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하세요. 우리집 문 앞으로만 지나가지 않으면 되는데, 그러면 그가 매일 뭘 하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에게 주의하라고만 하세요.”라고 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자료를 배포하러 갔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파출소에 있던 경찰 두 명이 그의 집으로 가산을 몰수하러 갔다가 문밖에서 안으로 한번 쳐다만 보고는 곧장 파출소로 돌아가서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잘 지내세요. 돌아가세요. 돌아가세요.”라면서 당시 그 수련생을 바로 귀가조치 했다.

자료를 배포하다 파출소로 연행된 것 외, 그 수련생은 줄곧 아주 평온했으며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았다. 사실 그 동수와 접촉해보면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대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잘 찾아 법으로 대조하면서 자신을 찾았으며, 게다가 수구 또한 아주 잘 하고 있었다.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수련생을 숭배하지도 않았다. 나도 언젠가 그에게 “어떤 때는 진상지를 만들 자료를 아주 많이 구입하는데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어 본적이 있다. 그는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물건을 파니까 가서 구입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또 시장에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겠습니까? 무엇이 두렵다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는 수련생이 어느 날 복사기를 고치려 갔더니 수리공이 기계를 점검한 뒤 영수증을 요구했다. 그가 영수증을 가져오자 또 신분증을 요구하면서 전화번호까지 남기라고 했다. 다른 수련생이 이 사실을 알고는, 안전 문제를 고려하여야 되니까 복사기를 고칠 수 없으면 기계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왜 안 가져 와요. 비록 큰 돈이 드는 게 아니라도 모든 동수들이 아껴서 모은 돈이고 법을 실증하려고 가져 온 것입니다. 또 서비스 기간이니까 기계가 고장 나서 여기서 고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왜 고치지도 않고 가져오지도 않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아도 되니 제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안전에 주의하고 다른 동수에게 연루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사실 당시 수리공은 기계가 너무 심하게 고장나 고쳐줄 마음이 없어서 고의로 수련생을 난처하게 한 것이었다. 수련생이 다시 신분증을 가지고 복사기를 가지러 갔을 때, 그의 신분증은 보지도 않고 ” 기계 수리는 다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함부로 기계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다음부터는 잘 사용하세요. 다시 고장 나면 수리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수련생은 근본적으로 사악이 박해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기계가 고장 나 수리하려고 가는 것은 정상이며, 또 속인도 기계가 고장 나면 가서 수리하지 않는가? 왜 우선 생각하는 게 박해인가. 기계를 고치러 간 것은 박해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데 종종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 사악에게 틈을 타게 되는 것이다.

작년 초 나는 동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수련생은 작은 자료점을 세워 스스로 집에서 인터넷에 접속하여 다운로드했다. 줄곧 2년 동안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는 어느 수련생이 그가 인터넷에 접속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어떻게 접속했는지 묻게 되어 그 당시 바로 인터넷에 아주 순초롭게 접속했다. 그러자 수련생은 그를 보고 크게 놀라며 “당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접속하고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수련생은 “왜 그러십니까. 아주 안전합니다. 나는 이미 이렇게 2년 넘게 접속했고 거의 매일 명혜에 접속했는데 아주 좋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괜찮습니다.”라고 말다.

그 말을 들은 수련생은 그가 어떠한 안전 조치도 하지 않고, 이 방면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것을 보고 “당신이 이렇게 긴 시간동안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아무런 안전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뒤이어 안전 조치를 하지 않아 나타난 많은 문제와 조성된 손실들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라게 된 그는 나중에는 두려움 때문에 아주 긴 시간동안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인터넷에 접속하려 했지만 접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대량의 법공부를 통해 자신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또한 동수들과 교류를 하여서 점점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나는 당연히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맞고 또한 필수라고 생각한다. 정념만 강조하면서 안전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안전에만 주의하고 정념을 홀시해서도 안 된다. 위의 작은 예를 참고해 말하자면, 만약 수련생이 이에 대해 교류할 때 우선 동수에게 정념, 정념으로 하라고 격려해주고, 아울러 동수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일깨워 주고, 안전하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조치를 해주면서, 동수들이 어떻게 안전에 주의했는지 몇 편의 문장을 추천해 주었다면, 그 수련생이 한 단락 굽은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가 한 동수의 집으로 갔더니 한 무리 퇴직한 노인들이 동수집 아래층에서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가까이 가서 보니 다같이 대법 진상자료 전단지를 보고 있었다. 동수의 집으로 간 그는 동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 제가 방금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이해하고 진상을 알도록 자료를 준 것입니다. 그들이 진상을 알고 난 뒤, 그들을 구도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신의 수련 환경 또한 열어 놓았습니다.” 라고 했다. 그 수련생은 끊임없이 진상을 알림으로써 그의 주위 환경은 느슨해졌고 주위의 속인들도 모두 정념이 있게 된 것이었다.

“비전(非典)”동안 작은 구역에 드나드는 사람은 증명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수의 집은 자료점이기 때문에 다른 동수들이 늘 그의 집으로 드나들어야 했다. 한 수련생이 그의 집에 갔을 때 입구에 있던 경비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수련생을 찾는다고 했더니 경비원은 좀 망설이다가 들어가도록 했다. 잇따라 경비원도 그 동수의 집으로 따라 들어와서 자신이 말하는 특정한 시간에 온다면 그때 자유롭게 출입하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한 동수와 같이 “두려운“ 마음을 제거할 때 그 수련생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악이 가장 창궐할 때 현지 자료점이 사악에게 들켰다. 안에 았던 일체기계, 컴퓨터와 수많은 자료, 재료들을 급히 옮겨야 했다. 당시 수많은 경찰이 집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련생은 차를 운전하여 뛰어 들어가 경찰 눈앞에서 기계 및 대법자료 등을 실어 날랐다고 했다. 마침내 수련생이 차를 운전하고 떠날 때까지 사악은 그를 검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동적으로 동수에게 길을 비켜주면서 경찰차가 마당까지 나와 수련생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두렵지 않았습니까?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필경 사악은 이미 자료점을 포위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그 수련생은 “당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과 자료들을 옮기려고만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다면 내가 무슨 담으로 거기에 갔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또 ” 그 사건이 지난 뒤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후에 바로 지났기에 그 일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사실 당신이 그런 환경에서 몇 십 명의 경찰이 자료점을 포위한 것을 아는 정황에서도 정념 정행할 수 있었는데, 왜 지금은 심하게 “두려워“합니까. 관건은 사람 마음이 너무 많고 정념이 부족해서 조성된 것입니다. 겪은 일은 많지만 사람의 집착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리어 많은 것이 더해져 조성된 것입니다. 당시 사악은 왜 당신을 박해하지 않았을 까요? 당신은 그 당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았고, 우선적으로 어떻게 대법자료와 수련생을 구하느냐하는 기점이 법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히 신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라고 했다. 또 정법 노정이 오늘 이 한 걸음까지 이르렀는데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라는 법리를 이야기 해 주셨다. 우리가 정념정행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위험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사악의 박해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직 사람의 생각으로 앞에 부딪친 곤난을 대해서는 안 되는바, 필경 사악의 박해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번 세간에서 어떤 한 가지 일, 혹은 동수 간에 어떠한 문제가 나타났을 때, 동수들은 모두 자신의 자그마한 깨달음을 제출하는데 한 수련인 입장에서 어떻게 문제를 보아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내가 말한 깨달음이란 당신이 수련과정 중에서 매사마다 모두 정념(正念)을 갖고 대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이 한 마디 말은 아주 적절하게 대법수련의 깨달음을 형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이 부족하며 그의 신체가 약간 불편하기만 하면 그는 곧 나에게 “어찌하여 편안하지 않습니까, 스승님, 저는 어떻게 불편합니다.”라고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나는 오늘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묻는다. 내일 그가 어떤 기분 나쁜 일에 부딪히면 “나는 왜 늘 기분 나쁜 일에 부딪히는가.”라고 한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람의 깨달음이 너무나 낮다고 말한다. 사실 그의 몸이 불편할 때 마침 그에게 병을 배출하거나 혹은 한창 공이 자라면서 나타난 하나의 상태이지만 그는 여전히 좋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가 시달림에 부닥쳤을 때가, 바로 그가 心性(씬씽)을 제고할 기회이므로 그는 수련해야 하지 않는가. 이 조건이 없다면 그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이것도 견디기 어려워하고 저것도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그럼 또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수련할 방법이 없다. 바로 이 사람의 깨달음이 너무 낮다는 설명이다. 내가 가리킨 깨달음이란 이러한 깨달음이다. “(《미국 동부 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수련의 길에서 부딪히는 모순과 마난을 대할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법중에서 구세력(舊的势)은 이미 멀고 먼 시대에 이미 안배해 왔다고 알려주셨다. ”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인류의 사회, 우리들이 능히 볼 수 있는 이 일체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매 대법제자의 일거일동, 일언일행, 심지어 당신이 사색하는 하나의 문제마저 모두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장래에 당신들이 본다면 모두 상당히 세밀하게 배치된 것으로 내가 배치한 것이 아니며 이는 이러한 낡은 세력이 배치한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법회 설법》) 라고 말씀하셨다.

구세력을 부정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수련생은, 박해는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며, 사악에게 납치당하지 않은 것은 사악의 안배를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같은 생각은 단편적이라고 인식한다. 우리가 법을 통해 알고 있기로, 역사적으로 구세력은 이미 대법제자를 세밀하게 안배했다. 어떤 사람은 국외에다 안배했고, 어떤 사람은 노교소, 감옥으로 안배했으며 어떤 사람은 유리실소(流离失所)로, 어떤 사람은 집에서 수련하도록 안배했으며, 어떤 사람은 아주 확고하게 수련하게끔 안배하였고, 어떤 사람은 관건적인 시기에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키도록 안배했다. 사실 어떤 환경을 막론하고 그것은 단지 표면 공간에서 걸어가는 길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법으로 이야기하신 대로 한다면 구세력이 안배했다 해도 좋고, 자신이 잘못하여 조성한 마난도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에게서 찾고, 모순에 부딪히면 우선 자신을 보아야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만약 법의 요구에 부합한다면 각자의 수련환경에서 정념 정행하는 것은 바로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이며 바로 구(舊)세력의 안배를 타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건적인 것은, 우리가 진정하게 법리에서 얼마나 명백해졌는지, 사부님께서 이야기하신 법을 얼마나 진정하게 깨달았는가, 자신은 또 얼마나 법에 동화되었는가, 자신이 구도해야 할 중생을 얼마나 구도했는가, 자신의 사전에 서약한 대원을 얼마나 실행했는가, 진정하게 다른 공간에서 사악의 안배를 얼마나 타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층차의 한계로 부당한 곳이 있으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2007년 8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8/17/161002.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