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9월 3일] 《서유기》 중, 당승이 손오공을 쫓아낸 후 귀가 여섯 개 붙은 미후(진짜와 가짜 손오공)가 나타나 취경대사(取经大事)를 화란하여 네 명의 수련인은 또 한 차례 마난을 겪게 되었다.
불법을 확고히 수련 한다는 것은 곧 일심일의(一心一意)로서 조건이 없고, 이유가 없으며 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바른 믿음(正信)인 것이다.
대법제자는 하나의 정체이다. 우리가 수련을 시작한 뒤부터 허다한 마난이 있는 것은 우리의 “두 마음”(“二心”) 을 겨냥하여 생긴 것이다. 비록 구세력의 행위가 승인받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만약 “두 마음”이 없었더라면 많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7. 20 이 시작 된 후, 사악이 사존님을 모욕, 욕설, 먹칠을 할 때 의심하고, 곤혹스러워 하면서 “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가? 아니면 사부님의 청백을 확고히 믿고 태연부동(坦然不动) 했는가 ? 사악이 대법에 대해 비방, 날조할 때, 또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두 마음”을 움직였는가 ?
사부님께 “두 마음” 이 생기면 곧 자신의 관념에 집착하게 되고,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빗나가게 되며, 심지어 당신이 가짜 경문을 보게끔 할 것이며, 당신의 집착에 근거하여 당신을 사로(邪路)로 이끌 것이다. 동수에 대해 “두 마음”이 생기면 곧 서로 의심하고, 서로 질책하며, 안을 향해 찾지 않고, 협조가 되지 않아 정체에도 누락이 생길 것이며, 안전방면에도 필연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일심불란”(一心不乱)한 수련만이 비로소 정념이다.
어느 수련생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법에서 깨우친 법리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자신의 수련과정에 응용하고, 얼마나 큰 곤란이 있고, 몇 번을 실패했던지 모두 금강부동의 신념(神念)으로 노력하고, 부동한 층차의 법리 중에 용련되면서 자신의 신심(身心)이 부동한 층차의 표준에 도달했는지 안 했는지를 검험하는 것이다. 자신이 부딪힌 일로 고비를 넘기고, 버려야 할 마음을 두고서 법리가 통하는지, 심지어 영험한지 안 한지 가늠하는 게 아니다”. (주: 이러한 “영험한지 안한지”가 바로 “두 마음” 의 표현으로서 바로 대법에 반문(反问)하는 것이며, 바로 법에 대한 불경(不敬)이다. )
“두 마음”이 있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모두에게 멸시당할 것이며, 수련자로 말하면 그것은 치욕이다. 걸어온 수련 노정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나에게 수시로 반응되어 나온 바르지 못한 염두는 바로 나자신의 “두 마음”이 수작을 부린 것으로, 정념과 사람 마음 가운데 취사(取舍)가 제대로 안 되어 비로소 교란 당하고, 비로소 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으며, 비로소 사람을 구원할 기연을 끊임없이 놓쳐 버렸던 것이다.
지금 매분 매초마다 세인을 독해하는 박해가 가해지고 있어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대사를 가로 막고 있다. 발생하지 않았어야 할 이번의 박해를 즉각 종식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전체 대법제자들이 마땅히 “일심”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문장발표 : 2007년 9월 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9/3/1620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