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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들이 마땅히 각성해야 할 3가지 문제

글/북미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8월 15일】

1. 법에 있지 않은 협조

북미 일부 지역에서는 주말마다 늘 크고 작은 회의가 열린다. 어떤 회의는 아주 오랜 시간 모두 일과 연구 사업에만 사용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법공부를 한 후 교류에서도 여전히 기술적인 층면에만 머물러 수련과 정체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교류를 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협조인과 관련이 있으며 사실 또한 우리 매 사람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 진정 효과적인 협조인지에 대해 여전히 좀 모호하다.

명혜망 2007년 7월 31일 하북(河北) 대법제자가 쓴 『협조 사업 가운데서 수련제고하다』란 문장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말했는데 바로 다음과 같다. “매 하나의 일을 통해 우리는 한 협조인으로서 사업상에서만 협조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협조는 마땅히 어떻게 법공부를 잘하고 어떻게 인식을 제고하며,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법에서 자신을 찾아보며, 자신의 행위를 법으로 비춰보며, 그리하여 자신을 바르게 닦아 공동으로 제고하여 ‘정체제고, 정체 승화’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비로소 진정한 제고이다.” 사실 우리 매 사람은 모두 진상을 알리는 창구이며 매 사람은 다 협조인이며 그 어떤 일을 하든, 언제 어디서든, 오직 법인식이 또렷하여 할 수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잘할 수 있고 비로소 돌파할 수 있다.

2. 자신을 실증

무엇이 자신을 실증하는 것인가? 어떤 때 우리는 우리가 대법을 실증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자신을 실증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이 법을 실증한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뭐라고 해도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의견에 충격(衝擊)을 주고 당신의 목소리를 눌러 당신이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거나, 만약 다른 사람이 당신의 어떤 문제에 견주어 당신에게 반대 의견을 제출하거나 혹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당신이 불편을 느낄 때, 당신은 일어나서 반대하고 변명한다. 그리하여 주제에서 벗어남을 조성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데, 가장 선의적인 변명이라 할지라도 당신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박수) 왜냐하면 당신이 대법을 제1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이 제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3. 천목과 공능을 추구

어떤 수련생이 천목으로 볼 수 있으면 다른 어떤 수련생은 心性(씬씽)을 지키지 못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면 천목이 열린 동수에게 의지하고 천목이 열린 동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봐달라고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대법수련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누가 무엇을 보았다고 듣기만 하면 곧 진리로 여기면서 동수들 가운데서 서로 전한다.

사실 법을 얻은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줄곧 하나의 깨달음에 의거하고 있다. 즉, 줄곧 우리가 법에서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공능은 단지 수련중의 부산물일 뿐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한다. 공능에 집착하면 편차가 나타날 수 있으며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보았든 모두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본 것이 수련에 좋은 점이 없다면 마땅히 주의해야 하며 일부 가상에 이끌려 대법수련을 저애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꼬마제자가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다면 어른들은 꼬마제자가 천목으로 본 것에 호기심을 갖고 이런 저런 것을 묻거나 또는 아이가 본 것을 이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바르지 못한 표현이자 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천목에 대해 추구하지만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편차가 나타나기가 아주 쉽다. 이런 종류의 방식은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아주 많은 공간의 생명은 중첩된 것으로 어떤 아이가 누구에게 좋지 못한 영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해도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대법제자와 영체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일 수 있다. 만약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전한다면 그것이 바로 난법(亂法)이다. 보호자는 마땅히 아이에게 순정한 수련환경을 열어주어야 하며 꼬마제자로 하여금 이런 저런 것을 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꼬마제자로 하여금 법학습을 하도록 고무격려하고 다른 어떤 일이든 그 안에 더해 넣지 말아야 하는데 더하기만 하면 곧 편차가 생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놓아야 하며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데 또한 아이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또 어떤 수련생은 늘 공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부 수련생들에게 일부 부동한 공간의 정법 정황을 보게 했다. 목적은 수련생들이 법을 실증하는 신심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아직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며 법에서 수련하지 못하는데, 심지어 일이 있으면 공능이 있는 수련생을 찾아가 봐 달라 하고, 본 것으로 어떻게 대법 일을 하고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하는 지도(指導)로 삼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매우 위험한 것이다. 누가 정법의 근본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똑똑히 말할 수 있겠는가? 층차가 극히 낮은 표현은 진상의 근본이 아니다. 법에서 수련하지 않고 법에 따라 하지 않는데 그럼 당신은 그래도 대법제자인가? 일만 있으면 그더러 이런 일인가 아닌가를 봐 달라고 하는데 무엇을 본단 말인가? 누가 당신의 근본을 보아 낼 수 있는가? 당신의 아이도 안 된다. 나는 모두 말한 적이 있다. 대법제자의 내부라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만약 당신들의 진실한 수련 정황을 본다면 그럼 또 무엇을 더 수련하겠는가? 당신에게 알려준다면 무엇이든 다 풀려버린다.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부동한 층차 중에는 부동한 표현형식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층차의 표현이든지 그 층차 중의 생명을 놓고 말하면 모두 진리이다. 층층마다 모두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일의 부동한 층차의 표현일 뿐이며 가장 근본적인 표현은 도리어 위에 있으며 최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인 근본이다. 당신이 어느 층차 중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대법제자의 근본적인 진상이고 정법의 진상이며 사부의 진상인가? 만일 당신이 오늘 대법제자와 사부의 근본적 진상, 대법의 진상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오늘 바로 이 무량한 우주의 주(主)이다! 당신이 모두 다 보았는가? 일체를 모두 한눈에 다 보았는가? 당신은 어찌 그렇게 얼떨떨할 수 있는가? 나는 여러 번 법에서 이야기했는데 당신들은 어찌하여 기어코 교란을 받으려고 하는가?”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부님뿐이며 대법제자가 무엇을 보았든지 우리 수련에 도움을 주는 그런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그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수련과정 중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하물며 어떤 수련생이 본 것은 가상인데 그럼 보다 마땅히 자신을 각성해야 한다.

문장발표 : 2007년 8월 1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8/15/16082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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