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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과 발정념에 대해 좀 말해 보자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8월2일] 명혜망에, 여전히 박해로 단식을 한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오르는 것을 보고 동수들과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교류하고자 한다. 모두 개인의 견해이므로 부당한 곳은 동수들께서 시정해주기 바란다.

중공 사당(邪黨)은 파룬궁을 박해한 8년 동안 지극히 잔인하고 사악한 수단을 채용하였다. 박해를 제압하는 가운데 어떤 동수들은 단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대법제자들이 속인중의 이런 극단적인 방식을 이용할 때 표현해 낸 견정, 순정 그리고 사부님 법신의 보호와 무변대법(無變大法)의 법력이 대법제자의 표면 신체에서의 초상적인 표현은 초기에 확실히 사악을 놀라게 하는 작용을 일으켰고, 적지 않은 동수들이 그 때문에 사악의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였고, 불법(不法)으로 수감되어 박해를 받기만 하면 곧 단식을 하였는데 마치 관례가 된 듯 하였다. 박해 받고 돌아오면 이렇게 묻는 수련생이 있다. “당신은 그곳에서 단식을 했습니까?” 박해 받았던 동수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다. “나는 그곳에서 단식을 했어요” 뜻인즉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마치 단식은 박해 받는 중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길로 된 듯 싶다.

사실상 이런 인식은 구세력이 안배한 이번 박해를 승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박해 가운데로부터 자본과 만족을 얻는 그러한 일종의 감각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 마음의 표현이다. 이는 다른 공간의 흑수 난귀, 악당사령(惡黨邪靈)에게 틈탈 기회를 보여 주었고, 세상의 악인들을 이용하여 각종 음식물 주입, 주사, 관 꽂기와 같은 잔인한 수단으로 단식하는 대법제자를 괴롭히게 하였으며, 신체는 부동한 정도로 상해를 받았거나 어떤 사람은 박해로 치사까지 하였다. 형세는 이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변하였다. 더욱 엄중한 것은 어떤 사람들은 사부님에 대해, 법에 대해 의심이 생겼다. 단식이 어찌하여 작용이 없는가? 사부님 법신은 왜서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가? 그런데 이는 바로 그 흑수 사령들이 도달하려는 목적으로써, 당신더러 미혹과 의심이 생기게 하고 포기하게 하여 대법제자를 훼멸하려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최근에 발표하신 《미국 수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大法弟子들이 박해 받은 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8년이 되었다. 이 과정 중에서 大法弟子들은 많은 어려운 길을 걸어왔으며 몹시 쉽지 않았다. 첫 시작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이번 박해를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르던 데로부터 여러분들은 점차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비단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박해의 엄혹함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또한 더욱더 이지적이고 더욱더 청성(淸醒)하게 했다.”

단식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건대, 불법(不法)으로 수감 되어 박해 받은 대법제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 마땅히 하나의 이성적인 청성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대법제자가 어떻게 배합과 협조를 더 잘하여 철저히 사악을 해체시키겠는가와 관련되며 특히는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검은 소굴내의 사악한 요소를 해체하고 박해를 결속 지으며 더욱 효과적으로 폭넓게 진상을 알리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세 가지 개인 인식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정념이 첫 자리이고 단식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채용했다 하더라도 역시 부득이한 경우에 쓰는 하책이다.

2000년 내가 처음으로 간수소에 갇혔을 때 나는 단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물 공급이 끊어지자 한 수련생이 마땅히 단식을 해야 한다고 깨우쳤다. 왜냐하면 물 공급이 정지되면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또한 밥도 먹을 수 없게 된다.(간수소의 화장실은 집안에 있고, 식사하고 화장실 가고 잠자는 것마저 모두 한 방에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사람마다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였다.

나는 당시 공안 경찰에게 기만 당하여 이른바 “보증서”를 썼는데, 그것은 확실히 기만이었다. 그들은 동수 친구의 돈을 받고 나를 풀어주겠다고 승낙하고는 그들이 구술하고 나더러 쓰게 한 다음 나중에 나의 손을 잡아다 손지장을 찍게하였던 것이다. 나는 나가려는 것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물결따라 밀려가는 배처럼 얼떨떨한 채 그들에게 순종하고 말았다. 감방으로 돌아와 천천히 청성해지자 후회막급하였다. 꿈에 “이전의 공로 모두 수포로”라는 몇 글자가 나타났고, 정말 만장 심연 속으로 떨어지려 하였다. 나는 단식하는데 가입하여 자신을 씻어내고 수련하려는 결심과 대법에 대한 신심(信心)을 나타내려는 것만 있었을 뿐 기타의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음식물 주입을 한 번 당했다. 물이 왔고 단식도 끝났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때 단식했거나 하지 않은 동수들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동교양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비록 박해에서 벗어났지만 조건이 있는 것으로 자신의 수련에 오점을 칠하였다. 후에 성명을 발표하긴 했으나 유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대법실증과 진상을 알리는 일을 지연시켰다. 어느 관점에서 말한다 해도 모두 마땅히 발생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나는 본래 벗어날 기회가 있었는데, 도리어 수감되기를 기다려 굽은 길을 걸었고 또 단식까지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잡힌 날 저녁, 나는 수갑에서 손을 빼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 언뜻 나타난 것은 강대한 정념인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잠에 곯아 떨어진 경찰과 여러 곳의 잠겨진 대문이어서 손을 도리어 수갑 속에 밀어 넣었다. 완전히 자신을 속인으로 여겼고, 기회를 헛되게 놓친 것으로 박해를 승인, 접수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의 법신이 관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두 자신의 의지가 분명하지 못하고 정념이 부족하여 조성된 것이 아닌가?

더 깊이 헤쳐 보면 잡히는 것마저 마땅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가 진정으로 법공부를 잘하고, 진정으로 대법의 요구대로 했다면 이번 박해는 근본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해는 구세력이 강요한 것이지 사부님이 요구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박해가 발생하기 전, 사부님은 이미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그 후, 또 우리에게 발정념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바로 박해를 제압하고 반박해하는 법보(法寶)가 아닌가 ? 운용을 잘하고 정념이 족하면 사악도 접근하기 두려워한다. 박해를 받는다 해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마땅히 정념으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이지 사람의 방법이 아니다. 단식은 사람의 도리 중에서도 신체를 상해하는 것으로서 현명하지 못한 책략일 뿐만 아니라 쉽사리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 있고, 요언을 날조하여 대법을 모함하는 구실로 될 수 있다.

2. 자신을 내려 놓고 철저히 박해를 부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정념이다

2003년 나는 두번째로 구치소에서 박해받을 때도 단식을 하였다. 그때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빨리 나가는 것이었다. 결국 나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교양소로 이송당하게 되었다. 같은 감방에 있던 단식을 하지 않은 수련생은 도리어 나갔다.

이 동수 분은 농촌 부인으로서 사상이 단순하고 순박하였다. 다른 동수들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책을 보고 연공만 할 뿐 진상 알리기, 발정념하는 일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 몇 몇 동수들의 진상 알리기에 대한 교류를 듣고 나서 그녀는 진정 마음속으로부터 조급해하면서 성근하고도 박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서 즉각 그의 친지, 이웃, 마을 안팎의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진상을 알려 주어야 하겠다. 이렇게 요긴한 일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이튿날 이른 아침, 신체가 아주 좋던 그녀가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하는 증상을 나타냈다. 병원에 보내어 검사하고는 오후에 몇 사람이 그녀를 들고 돌아왔으며, 즉각 집에 알려 그녀를 데려가게 하였다. 기적이 발생한 것은 그녀 마음속에 박해를 받는다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없었고, 구치소에서 그녀는 진상 알리기, 발정념, 중생구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렇게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그녀가 가서 구해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그들을 위해 조급해했던 것이다. 이 일념은 사악을 타파하는 위력이 있었고, 일체 박해의 교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정념이며, 출발점은 중생구도이지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사부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대법제자의 정념은 위력이 있는 것이다“ (《정진요지》) 사악의 박해에 직면하여 어느 대법제자나 모두 직접 이 구절의 법을 실증하였다. 나 자신에게도 직접 겪은 체험이 있다. 2001년 4월, 바로 사부님의 이 경문이 발표되기 이틀 전, 공안국 경찰은 나를 공안국에 끌고가면서 한 중대한 안건 중에 수련생이 나를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찾을 때 나는 바로 경문을 보고 있었기에 나는 내가 하던 일을 마저 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내가 경문을 다 볼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렸다. 길에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대법제자이다. 사부님이 나를 관할하고 있으니 구세력이 나를 박해할 자격이 없다. 나에게 업력이 있고, 집착이 있긴 해도 박해 받을 수 없다. 자연히 사부님의 배치가 있을 것이다. 그때 사부님께서 아직 발정념이란 이 법을 말씀하시지 않았었지만 지금 보면 그것이 곧 발정념이 아닌가? 그들이 물을 때 나는 머리속으로 경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묻는지 나는 주의하여 듣지 않았지만 내가 하는 대답은 구절구절마다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할 말이 없게 하였다. 그들은 각종 수단을 다하여 나를 위협하려 하였으나 나에게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다른 공간의 구세력 생명들아, 너희들이 이 몇 사람을 박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상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그들을 이용하여 대법제자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 그로 인하여 그들이 죄를 짓게 된다면, 너희들을 제거할 것이다. 나는 당시에 온통 이 생각 뿐이었는데 비상하게 강대했고 비상하게 족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고, 박해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잡념도 없었으며, 아울러 정념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나에게 감히 악한 짓을 하지 못하였고 반대로 아주 공손하게 나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번 박해가 무엇을 구실로 삼던 간에 승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본질이 바로 사악한 파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령 우리가 근본적인 집착심을 버리지 않고, 색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쉽게 틈을 타게할 것이며, 집착 가운데서 정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이 두 번째로 박해받은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첫 번째 박해를 받은 후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을 찾아보지 않았고, 이번 박해의 실질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서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는지 참다운 사고가 없었기에 자신을 박해받는 가운데서 반박해 하게 하여 그렇게 큰 울타리 안에서 맴돌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때 자신에게는 무슨 근본적인 집착이 없다고만 여겼고, 사부님의 경문에 비추어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내가 대법에 들어선 것은 인간 세상을 벗어나 불도(成佛成道)로 되어 자신을 해탈하기 위해서였다. 상당히 긴 시간 나는 이것이 나의 근본 집착이며, 대법이 요구한 “무사무아(無私無雅), 선타후아(先他後俄)”(《정진요지》)와는 완전히 상반된다는 것과, 구우주의 패괴된 위사위아의 이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나는 또 색욕 방면에서 착오를 범했다. 행위상으로는 고쳤지만 사상상으로는 아직도 색욕지심의 실질적인 위해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주동적으로 그런 독소를 제거해 버리지 못하였다. 나의 관찰에 따르면,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어 박해 받는 동수들 중 아주 많이는 근본적 문제에서 인식이 분명하지 못하며, 더욱이 반복적으로 박해받는 그런 동수들은 표면상의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근본상에서 가능하게 자신의 수련에 누락이 있어 흑수, 사령에게 이용당하여 박해를 받았을 것이다. 강대한 정념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해야 하며, 자신을 진정으로 대법이 우리에 대한 부동한 층차에서의 요구에 도달하게 하여야 하며 사악에게 어떠한 박해 구실도 주지 말아야 한다.

3. 지금으로 놓고 말하면, 수감되어 박해 받는 동수들은 마땅히 마음을 조용히 하고 더욱 많이 자신의 집착을 찾아야 한다. 특히 근본적 집착심과 색욕심, 사람 마음을 내려 놓고 발정념을 많이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박해받는 제자에 대해 《슬퍼 말아라》라는 시 한 수를 쓰시어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명확히 알려주셨다. “몸이 감옥에 갇혔다고 슬퍼하지 마라 정념정행하면 법이 있거니 조용히 생각해 보니 집착한 일 얼마더냐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2》) 사부님은 또 말씀하셨다. 나의 대법제자들이 박해받아 죽었거나 아니면 이 시기에 낡은 세력에게 박해받아 갔거나 그들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 원만했다.(《2007년 뉴욕 법회 설법》) 오직 대법 가운데서 수련하기만 하면 결과는 곧 필히 이룩될 것이다. 이렇다 할진대 어디에 있은들 수련이 아니겠는가? 어디에 있다 해도 모두 그것을 수련으로 여겨야 하며 모두 수련인의 요구에 따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

내가 박해 받을 때 가장 근심한 것이 바로 굽은길을 걸은 것으로 하여 사부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날마다 이 근심과 많고 많은 인식이 분명하지 못한 집착에 얽매여 시달리다 보니 아주 고생스러워, 늘 잠자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논어》를 외우면서 자꾸만 자신에게 낙심하지 말아라, 대법은 끝이 없다는 것을 믿어라 하고 알려 주고는 하였다. 비록 발정념을 알긴 하였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씬씽을 지키고, 정념을 유지하기란 실로 아주 어려웠다. 노동교양소에서 처음으로 줄을 지어 밥을 타 먹는 몇 백명 대법제자를 보았을 때, 나는 즉시 생각하였다.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들이 함께 발정념 한다면 필연코 이 노동교양소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 일념이 나오자 눈 앞에 즉각 한 장면이 나타났다. 대법제자들이 운동장을 메우며 가득히 앉아서 입장하고 발정념 하는데 만 갈래 금빛이 하늘을 꿰지르자 삽시간에 하늘이 맑아졌다. 나는 당시 그 검은 소굴은 다른 공간의 흑수, 난귀, 악당 사령에 의해 지탱해 가고 있으며, 그것들이 끊임없이 안에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있으면서 박해를 유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악을 제거하자면 반드시 정념에 의지해야 하며, 반드시 대법제자의 정체적인 정념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자》란 법이 노동교양소로 전해 들어온 후 더욱 많은 대법제자들은 끊임없이 발정념을 하였기에 사악을 뚜렷하게 제거했고 제압하였다. 이 공간에 표현된 것으로는 바로 교관과 그 가족이 연속 악보를 받아 아주 많은 박해 활동이 모두 정지된 그것이다.

지금 나는 깨우쳤다. 단식은 피동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박해를 승인한다는 것을 전제로 박해 가운데서 반박해를 하는 것일 뿐 자신의 신의 일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발정념은 주동적인 것이며 먼저 사상가운데 자신은 대법제자이며, 신의 길로 걸어가는 수련인이며, 사악을 전승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중생구도의 책임을 짊어졌으며, 이 방면으로 자비, 지혜로 구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구도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은 대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공능을 운용하여 교란 파괴하는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철저히 해체해야 하는데 목적은 역시 장애를 제거하고 더욱 잘, 더욱 많이 중생을 구도하려는데 있다. 박해받는 가운데 사악과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들을 해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발정념은 바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바로 간접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가령 이 공간의 가상을 돌파할 수 있다면 곧 표면 환경의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강대한 정념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대법제자들이 일심협력 한다면,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고 박해를 제지하며 박해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8월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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