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다롄(大連)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7월 23일】 최근에 동수들과 교류하는 중에서 아주 많은 동수들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경문을 언급했다. “우리는 낡은 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상에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 법회 설법」)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잘 해낼 수 있는가?
나는 또 사부님께서 『각 지역 설법 4』「대뉴욕 지역 법회 설법」중에서 하신 “나는 잡혀 와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면 나는 법을 실증하러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럼 그 사악한 그것들은 두려워한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원래 나는 이 한 단락 법리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했다. 사악이 우리들을 감옥에 잡아넣는데 그러나 감옥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아니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철저히 부정하고 정정당당하게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왜 그 수련생이 왔으니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최근에야 나는 그 제자가 돌아가려 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며 그가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법을 실증하러 왔다’고만 생각한다면 정말로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각 지역 설법 4』「대뉴욕 지역 법회 설법」)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를 가든지 막론하고 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서 중생을 구도하고 발정념을 포함하여 안을 향해 찾는 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바르게 규정한다면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확고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악의 안배는 저절로 해체될 것이다. 또한 과정 중에서 그 자신의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사부님께 완전히 맡긴다면 머리에 근본적으로 ‘감옥 안과 밖’이라는 사람의 관념이 없으므로 돌아가는가 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조차 없게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능히 바르게 갈 수 있으며 당신의 정념이 아주 충족하고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고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한다면 당신은 낡은 세력을 부정하고 당신 역시 당신의 길을 올바르게 걷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대법제자들은 몸이 어디에 있거나 어떤 상황 하에서거나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속으로 오직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기만 한다면 구우주(舊宇宙)의 모든 표현과 요소 중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곧 부동한 층차에서 신우주(新宇宙)의 무사무아(無私無我)한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구우주의 중생들이 대법제자로부터 대법의 위엄과 자비를 견증하게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대법을 승인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을 수 있다.
한 노인 제자가 법정에서 오직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만 생각했다. 매우 많은 경찰들이 현장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사부님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진상을 듣게 하셨으니 참 좋구나 하는 순정한 심태로 모든 경찰과 법관들에게 대법진상을 알리고 『9평』을 말하며 3퇴를 권했다. 그러자 경찰과 법관들은 모두 허허 웃으면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것은 생명이 진정으로 진상을 알고 구도된 후의 기쁨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은 꼭 가장 좋은 결과였으며 이 제자는 정정당당하게 법정에서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원래 불법 수감 과정 중에 생각했던 것은 ‘내게 반드시 무언가 누락이 있어 구세력(舊勢力)이 나를 감히 박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心性(씬씽)에서 문제를 찾았으니 구세력은 나를 이렇게 제약할 수 없다. 나도 발정념을 하고 진상을 알리고 이 모든 박해를 승인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불법 수감 중에 있는가? 아직도 근본 집착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닌가?’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머릿속에 이미 비자각적으로 나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첫 자리에 놓고 타파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속에 자신을 해탈하고자 하며 고생을 두려워하는 이기심이 숨겨져 있었을 뿐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지 못했다. 지금 완전히 반드시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것인가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구세력의 안배를 철저히 부정하지 못할 게 없다.
우리는 모두 사부님의 안배와 구세력의 안배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사명임을 알고 있다. 구세력의 안배를 타파하는 것은 우리가 신우주의 법리를 실천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사심(私心)의 작용 하에서 우리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타파하는 것을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사념(私念)을 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타파한다면 변칙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승인하는 것이 되며 여전히 구우주의 이치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수련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생사의 생각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틀림없이 두려워한다. 만약 모든 수련생들이 모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사악한 것은 바로 자멸(自滅)할 것이다.”(『정진요지2』 「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
지금 내가 깨달은 것은 이 법리 중에서 한 층의 내포이다.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고 자신이 어떠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으며 완전히 법을 위해 책임지고 완전히 중생을 위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 해야만 구우주(舊宇宙)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법에서 뛰쳐나올 수 있다.
수련생을 구원하는 중에 혹은 수련생이 불법으로 법정에서 판결 받을 때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리가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수련생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법정에서 이른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다시 말해 사악의 안배와 마난 자체를 타파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더욱 우리에 대한 대법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으며 또 더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신들은 영원히 이 한 점을 기억하라. 즉 누가 교란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잠시 적이며 모두 가상이며 모두 주체(主體)가 아니며 모두 일종 공기와 같은 유통이다.”
“자연적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그러한 유형적이거나 무형적인 요소는 당신들로 말하면 아무런 영향도 없으며 정념정행 하는 대법제자를 누구도 조종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박해가 막 시작되었을 때 많은 제자들은 쉽사리 악인의 연기를 보고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모두 법공부를 통해 속인의 관념을 타파했고 사람의 표현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울러 사람의 배후에서 사악의 요소가 조종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울러 정법수련과 끊임없는 승화를 통해 우리는 점차적으로, 사실 사악한 요소의 표현 역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비록 구세력의 생명은 겉보기에 그것의 표현이 확실하고 확실한 것 같지만 우리가 기점을 바로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가 구아(舊我)를 버리고 주동적으로 대법에 동화하여 신우주의 법리가 우리에게 펼쳐지는 순간, 우리는 사악의 모든 교란이 다 가상임을 보아낼 수 있다. 오직 사부님의 정법과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것만이 확실하고 확실하며 이때 대법제자는 ‘정천독존(頂天獨尊)’함을 느낄 수 있으며 사악은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정념 중에서 사악의 요소는 자연히 해체되어 사라진다.
층차의 한계로 문장 중에 부당한 부분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 발표: 2007년 7월 23일
문장 분류: 수련마당
원문 위치:http://minghui.org/mh/articles/2007/7/23/1593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