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7년 7월18일] 1994년 6월, 셴닝 온천의 많은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6월11일 하남성 정주시에서 8일간의 학습반을 꾸린다는 소식을 들고 무한 수련생들에게 14개의 표를 부탁했다. (매 한장에 40원) 6월 10일 우리 셴닝 온천의 일행 20명은 차를 타고 무한으로 간 다음 한구에서 정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고 대략 저녁 6시 경이 되어 정주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역을 나서니 대법 수련생이 “파룬궁”이란 팻말을 들고 우리 일행을 “민족식당”으로 안내하였다. 남자 수련생들은 대청 안에서 시몬스 매트리스 침대에서 잤는데, 한 명당 5원이었고 여자 수련생들은 다른 한 대청에서 잤으며 매 침대마다 2원 50전이 하루 비용이었다.
당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은 매우 격동되었고 모두 사부님을 빨리 뵙고싶어 했다. 그 이튿날 아침 6월11일 9시에서 11시까지 사부님께서는 “비바람 운동장”에서 공을 가진(带功) 한 차례의 보고를 진행했다. 대략 천 칠 백여명의 수강생들이 참가했다. 운동장은 동그랗게 생겨 안에 들어서니 마치 예당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사방에는 낡은 벽돌로 벽을 쌓았고 위의 유리 창문도 온전하지 못한 것이었고 지붕은 철판인데 낡은 것이라 온통 구멍 천지였다. 운동장은 세면바닥이었고 우측의 3,4층의 바닥에는 역시 시멘트로 된 관람대가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운동장에 있었고 일부분은 관람대와 계단에서 사부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사부님께서 오신다”하고 소리쳐 여러 사람들은 일어서서 열렬히 박수를 쳤다. 웅장하고 상냥하신 사부님께서 소박한 흰색 반적삼을 입고 문어귀에 조금 섰다가 강의대로 올라가셨다. 강의대에는 오직 나무 책상 하나만 있었고 위에는 마이크 하나가 있었다. 불빛은 그리 밝지 않았고 직접 사부님을 비추었다. 사부님께서는 간단하게 당신을 소개하신 후에 설법을 하시기 시작했다.
6월 11일부터 사부님께서는 매일 저녁 6시부터 설법하시고 수강생들의 지출을 절약하기 위하여 일요일 오전과 오후, 저녁에 각각 한 강의씩 설법하셨다. 매일 저녁마다 사부님께서는 모두 제시간에 도착하셨고 종래로 늦게 오신 적이 없었다.
다음날 토요일(6월12일) 오후에 설법을 한지 약 반 시간쯤지나자 먹장구름이 몰려오면서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거센 바람이 한바탕 지나간 후 폭우가 억수같이 퍼부었고 우박도 같이 쏟아졌다. 위 지붕을 두드리면서 구멍난 곳에서 우박이 떨어져 내렸다. 비바람이 문창으로 들어와 많은 사람들의 의복이 푹 젖었다. 전기도 끊어지고 수강생들 중에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당시에 사부님께서는 한 단락의 설법을 했다. 대체적인 내용은, “당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역시 이런 교란이 있었다. 당시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촛불을 꺼버렸고 석가모니 제자들이 당시에 조금 소란이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교란을 받지 말 것을 알려 주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캄캄한 중에 계속 설법을 하시었다.” 사부님께서 이 단락의 설법을 하신 후 수강생들은 안정되었다.
공작인력이 촛불을 붙이자 사부님께서는 책상 위를 청리한 다음 그 자리에서 가부좌하고 큰 수인을 돌린 다음 손으로 무엇을 잡아서 물병 사리 안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묵묵히 앉아서 사부님의 일거 일동을 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바람이 멎고 하늘도 차츰 밝아지면서 태양도 얼굴을 내밀었고 전기도 켜졌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 이 반의 소질은 매우 좋고 가지고 온 물건도 적지 않다.”고 하셨다. 그런 후 설법을 계속 하시었다.
이튿날 어떤 수강생이 황하강변으로 놀려갔는데, 허리만큼 굵은 큰 나무가 뿌리채 뽑힌 것을 많이 발견했다. 그제서야 원래 사부님께서 어제 마귀를 제거한 것인줄 알았다. 하루를 지난 다음 우리는 곧 조건이 좋은 예당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번 설법 기간 동안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떤 수강생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세수한 다음 7시가 되어도 수강생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자 사발을 들고 소리쳤다. “형제들, 아침이 지나갔습니다.” 사부님께서 아침 9시에 설법하시기 전에 웃으시면서 “어떤 수련생은 아침에 사발을 두드리면서 형제들 일찍 일어나자고 했다”라고 말해 여러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우리의 일언 일행을 장악하시고 있으니 절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절실히 느꼈다.
또 한 여수련생은 50여세이다. 어느날 밖에 나가 밥을 먹게 되었는데, 몸에 지니고 있던 보따리를 잃어버리고 찾지 못했다. 보따리 안에는 일 만 원 정도 되는 예금통장과 여러 증명서 그리고 한 권의 《중국 파룬궁》 책이 있었다. 그는 조급하여 사부님께 알렸다. 사부님께서는, “이후에 조심하라”고 하셨다. 며칠이 지나자 이 수련생은 또 그 식당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다. 한 청년이 바로 한 권의 《중국파룬궁》을 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책에 적혀 있으므로 나가서 보니 바로 자신의 그 책이었다. “이것은 나의 책인데 보따리는 어디에?” 그 청년은 곧바로 책과 보따리를 그에게 주었다. 그가 펼쳐보니 예금통장, 증명서, 현금 등 하나도 없지 않았다. 그 청년은 경악하여 말하는 것이 “아, 어째서 나는 보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 여수련생은 곧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는 것인줄 알았다!
정주에서 법을 전한 후 제일 마지막 하루 낮에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과 사진을 찍기로 했다. 호북 무한, 황강, 마청 그리고 기타 지방의 수강생들은 각각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셴닝에서 간 수강생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해 갔으므로 명단도 없고 하여 누락이 있었다. 두 수강생은 이 사부님을 찾았고, 그중에 이름이 왕씨인 수강생이 사부님에게 말하기를, “우리 셴닝은 자발적으로 조직해 왔고 보도원도 없으며 조직하는 사람도 없지만 사부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히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병을 치료하러 오지 않았다.” 한면으로 말하면서 한면으로는 밑을 향해 원을 그렸다. 원래 쇼왕은 아주 어릴때부터 곧 심장병이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벌써 이것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쇼왕은 급히 하는 말이 “나는 병을 치료하려고 온것이 아니라 곧 사부님과 사진을 찍기 위해서 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분들이 다찍고 난 다음 당신들과 찍겠다.”라고 하셨고, 우리는 한쪽에서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니 다른 수련생들이 모두 다 찍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면서 “당신들은 오라, 당신들은 오라” 우리 모두가 “정주 파룬궁 학습반”이란 현수막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할 때 사진사는 우리의 명단이 없다고 찍기 싫어하여 얼굴을 돌려서 가려고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앞으로 나가 사진사를 불러서야 이 진귀한 순간을 남길 수 있었다.
당일 저녁 사부님께서는 산동 기남으로 설법하시러 가고 우리도 밤 9시 기차를 타고 기남으로 갔다. 그 이튿날 아침 8시에 기남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모두 노수련생이라 학습비용도 기존의 40원에서 25원으로 감소되었다. 사부님께서는 간고한 환경 가운데서 설법해 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헌신한 것이었다. 희망하건대 셴닝제자들과 전세계 대법제자들은 동수 사이의 간격을 돌파하고 원용불파(圆容不破)의 정체(整体)를 형성하여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조사정법하기를 바란다.
문장완성 : 2007年 07月16日
문장발표 : 2007年 07月18日
문장수정 : 2007年 07月17日 21:43:21
문장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7/18/15906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