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7월 25일】 박해를 철저히 결속 짓고 중생 구도를 더욱 잘 하려면 반드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
1. 두려워하는 마음 제거
개인 수련 시기에 우리는 거의 모두 ‘병업관(病業關)’을 넘었다. 그 병근(病根), 그 다른 공간의 영체(靈體)를 사부님께서는 우리 몸에서 떼여버려 다만 검은 기가 약간 남아 밖으로 나올 뿐이었다. 몸에서 여러 가지 ‘병’의 상태가 반영될 때 우리가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고 정념으로 ‘병’을 부정할 수만 있다면 그 병은 아주 빨리 지나가고 곧 없어질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정념이 없고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면 정말로 자신이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늘 병이라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병이라고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심이기에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번거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전법륜(轉法輪)』)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박해를 사람에 대한 사람의 박해로 보고, 동향을 보고, 형세를 보면서 조그마한 변고가 있어도 곧 박해가 올 것이며, 더 ‘가중’될 거라고 여기면서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다면, 신체가 조금 불편해도 병이라고 여기고 병을 두려워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박해가 줄곧 계속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 일부 대법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을 장기적으로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닌가?
2. 박해를 승인하는 마음을 제거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근원은 박해를 승인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부터 꼭 박해가 있을 거라고 여기면서 또 감당하기를 두려워하고, 속인 중의 이것저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로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적지 않은 동수들은 잠재의식에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 곧 박해받을 수 있고 박해 받는 것을 자연스런 일, 필연적인 일로 여긴다. 마치 수련을 하려면 반드시 난(難)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만 수련해 올라갈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대법수련이며, 이는 역사상의 그런 수련 형식이 아니란 것을 망각했다. 우리가 걷는 것은 중간의 대도(大道)이며 心性(씬씽)을 수련하는 것으로 “心性(씬씽)이 얼마 높으면 공도 얼마 높다.”
사부님께서는 예수가 사람을 구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를 말씀하실 때 “이런 것은 과거에 우주 중에서 그것은 이치이며 일체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로 놓고 보았을 때 낡은 우주의 법은 이 방면의 지혜가 결핍했기 때문인데 다음번에는 이렇지 않을 것이다.”(『2003년 캐나다 밴쿠버 법회 설법』) “사실 내가 창립[開創]하고자 하는 것, 내가 정법 중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후 하세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신(神)이 더 이상 삼계 내 중생에게 박해당하지 않는 문제를 포괄한다.”(『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수련의 길을 창립하는 대법제자로서 길을 바로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박해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부님의 정법 안배 가운데는 원래 대법제자가 고험을 받아야 하고 박해라는 이 한 난(難)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에게 원래 ‘병’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박해를 승인하며, 구세력(舊勢力)의 안배를 소극적으로 감당해야 하는가? 바로 우리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사실상 이번 박해를 승인했기 때문에 비로소 박해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박해를 구하는 마음을 제거
만일 누가 박해에 대해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아마 많은 동수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해 보자. 일찍이 박해를 받았으나 확고하게 대법을 수련하는 동수에 대해 탄복하는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가? 박해를 받아 인체를 잃은 동수에 대해 사부님께서 그들은 이미 원만했다고 말씀하셨기에 부러워하는 정을 품지는 않았는가? 묵묵히 아무 소리 없이 일을 하는 동수들에 대해 그들은 아주 평범하여 박해를 심하게 받은 동수들 보다 높이 수련하지 못한다고 여기진 않았는가? 자신이 박해받은 경력을 영광으로 여기진 않았는가?
위에서 서술한 이런 심리들은 모두 박해를 구하는 것이다.
사실, 박해받은 것은 우리에게 정념이 부족하고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세력에게 꼬투리를 잡힌 것으로 사부님의 정법에 어려움을 더해준 것이다.
우리 함께 사부님의 설법을 학습해보자.
“신의 눈에는 낡은 세력의 배치도 이러하다. 당신은 한 손으로 사람을 잡고 놓지 않으며 저쪽 손은 또 부처를 잡고 놓지 않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느 것을 가지려고 하는가?! 정말로 내려놓을 적에 정황은 같지 않다. 박해를 심하게 받은 지역, 파괴를 심하게 받은 곳, 그곳의 수련생은 정말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떤 수련생은 박해가 이처럼 긴 시간을 지속해 왔고 원래 표현이 괜찮은 그러한 사람들도 안 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보건대 이렇지 않다. 진짜 금은 갈수록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정말로 생사를 내려놓고 어떤 집착도 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직도 갈수록 안 된다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직도 당신에게 전향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직도 당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그 노동교양소의 몇 백 명, 천여 명 사람들이 모두 이처럼 해낼 수 있다면 내가 보건대 그 노역소 그곳은 감히 당신들을 거기에 수용할 수 있겠는가?! (『각 지역 설법 3』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법으로 대조해보면 우리는 곧 발견할 수 있다. 이번 박해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바르게 하지 못했고, 이런 집착 저런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박해 받은 것은 대법제자의 수련 중에서 영예롭지 못한 한 페이지이며,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바르게 걷지 않은 것이며, 자신의 수련의 길에서 곤두박질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수련자가 되어야 하며, 신념(神念)이 강하고 위력이 비할 바 없는 신이 되어야지 속인 중의 영웅이 되진 말아야 한다.
우리 철저하게 속인의 마음을 놓아 버리자. 우리가 오직 철저하게 병을 꿰뚫어 보고 병을 내려놓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철저하게 병이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오직 마음속으로부터 철저하게 이번 박해의 표현을 꿰뚫어 보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이번 박해를 철저히 제거하고 결속할 수 있다!
문장발표 : 2007년 7월 2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7/25/1595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