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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전변하고 사람에서 걸어 나와 진정으로 신통해지자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7월 17일】 최근 한동안 나는 줄곧 미망(迷茫)에 빠져 필사적으로 안을 향해 찾아보았으나 근본적인 집착을 찾아낼 수 없어 괴로웠다.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우리 시(市)에서 40여 명의 동수들이 잇따라 납치되고 자료점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우리는 피동적인 구원 속에 빠져 이 동수들을 아직 구원하지도 못했는데 저 동수에게 또 문제가 나타나곤 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일어나 그야말로 숨을 돌리기도 힘들었다.

이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마치 사악이 더욱 ‘창궐’해 진 것 같았고 박해가 더욱 ‘미친’ 것 같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사악이 대량으로 제거됨에 따라 그것은 이미 아주 약해졌고 정법의 장(场)은 갈수록 강대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곳의 표현은 도리어 상반되는가? 사실, 우리 지역 동수들에게 수련 중에 커다란 누락이 존재하고 명(名), 이(利) ,색욕(色慾), 정(情) 등 근본적인 집착을 제때에 닦아 버리지 못하여 구세력(舊勢力)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박해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정체를 겨냥한 박해이며 우리 지역 중생들이 구도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최근 며칠 동안 『전법륜』을 외웠는데 제6강 주화입마에 이런 단락이 있다 “당신이 이렇게 두려워하기만 하면 곧 공포심으로서 그것은 집착심이 아닌가? 당신의 집착심이 나오면 당신의 집착심을 제거해야 하지 않는가? 두려워할수록 더욱 병과 같이 되는데, 당신의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당신에게 이번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여, 공포심을 버리고 제고해 올라오게 한다.” ‘더욱 병과 같이 되는데’라는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뒤흔들면서 무언가 깨달음이 있 고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의 이 ‘미친 듯’한 가상은 우리의 어느 방면의 집착이 불러온 것일까?

1. 우리의 두려운 마음이 초래

우리의 두려운 마음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한가? 그것도 근원이 있는 것이다. 정법수련에 막 들어선 그 2년 동안 우리 많은 사람들은 법리상에서 분명하지 못하여 사악이 뚫고 들어와 엄혹한 박해를 하게 했으며 우리에게 완고하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형성되게 했다. 사실 지금 사악은 진즉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강렬한 두려움은 고질이 되어 우리 몸에 붙어서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 할수록 더 숨으려 하고 더 걸어 나오지 못하며 사악은 점점 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박해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구한 것이 아닌가? 가령 우리 대다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강대한 집착이 아니겠는가. 두려워할수록 사악은 더욱 ‘미친 듯’이 표현될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또 사람의 관념으로 생각한다. ‘사부님께는 법신이 있으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 않는가? 어찌하여 아직도 이렇게 우리를 박해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바른 믿음[正信]이 더욱 없어지고 더욱이 감히 걸어 나오지 못한다. 사실 모두 우리 자신의 ‘두려움’에서 온 것이 아닌가? 법에서는 일찍이 명백히 말했다. “그 法輪(파룬)이 어찌하여 그것이 들어오게 놔두는가? 스승님의 법신께서 우리들을 보호하고 계시지 않은가? 우리 이 우주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으며, 당신 자신이 가지려 하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전법륜』 제6강) 왜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의 기점은 사(私)에서 온다. 사실, 이 두려움 그것은 우리의 진짜 본성이 아니며, 그것은 다만 사람을 좌우지하는 하나의 요소일 따름으로 우리 수련인이 마땅히 버려야 할 최대의 집착이다.

우리는 모두 대법의 한 분자이며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를 제 위치로 밀어주셨으므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사악의 박해를 인정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사람으로 여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대법제자들이 모두 정념정행 할 수 있고 어떠한 정황하에서도 모두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한다면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모두 박해를 마주하고 두려운 마음이 나올 수 없는데 누가 감히 와서 당신을 박해하는가 보라! 완전히 법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닌가?”(『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일체 신통과 법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도리어 진정으로 신통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온 몸에 법보(法寶)를 지니고서도 도리어 사람의 껍질 속으로 움츠러 들어가 고생을 한다. 우리는 일사일념(一思一念), 일거일동(一擧一動)이 법에 있지 않음으로 인해 목숨이 겨우 붙어있는 사악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되돌아 다시 우리를 박해하게 하고 있다.

2. 우리 사람의 낡은 관념이 추구한 것

나 자신을 반성해 보니 일사일념이 법에 있지 않았음을 나는 보아냈다. 매번 수련생이 잡혀갔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사람 마음이 심해졌다. 왜냐하면 수련생이 또 박해를 받을 것이니 어서 발정념하여 수련생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수들이 모두 이러할 것인즉 마치 ‘아주 도리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이런 일념은 그다지 바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의 관념으로 가늠하여 먼저 그들이 틀림없이 수련생을 박해할 것이라고 인정하고, 수련생을 박해할 수 있다고 긍정했으니 이것이 정념인가? 이것이 그래 사람의 관념이 아닌가? 아울러 많든 적든 두려운 마음과 기타 집착이 생겨났는데 우리 자신이 사악의 박해에 구실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닌가?

『서유기』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손오공이 요괴를 굴복시킬 때 요정이 손오공을 뱃속에 삼켰다. 저팔계는 겁에 질려 숲속에 숨어서 통곡하면서 자기 형이 죽은 줄 알았다. 이때 손오공은 요정의 뱃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팔계야, 울긴 왜 울어, 난 죽지 않았어.” 팔계는 눈치 채지 못하고 말했다. “형님은 요정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어요?” 오공이 말했다. “바보야, 그것이 날 먹어야 그것의 심장을 끄집어내고 간을 파내며 내장을 움켜쥐고 못살게 할게 아니냐?”

이는 내 자신의 착오가 있는 곳을 보아내게 하였다. 나는 어찌하여 이러한 정념이 없을까? 팔계처럼 사람의 관념으로 이 일을 보았다. 머리돌려 우리들을 보자. 관념을 전변하고 ,사람의 관념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인식”을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만 보지 말고, 진정한 신의 정념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가령 수련생이 잡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박해 받으러 갔다고 여기지 말아야 할 뿐더러 정념으로 가지 해야 한다. 절대로 사악의 박해를 허락하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이것을 중생을 구도하고 사악을 해체하는 한 차례의 훌륭한 계기로 삼고 내외 협공하여 이런 검은 소굴을 철저히 해체해야 한다.

아마 어떤 동수들은 생각할 것이다. ‘손오공은 온 몸에 재간이 있고 또 여의봉까지 있으니 물론 그는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우린 안 돼.’ 나는 당신이 아직도 사람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무슨 법기(法器)인들 없는 것이 있는가? 아마 여의봉보다 비할 바 없이 더 대단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손오공의 오성이 없으며 또 그것을 쓸 줄 모른다. 늘 자신을 천덕꾸러기로 여기며, 늘 눈으로 보이는 것만 사실이라고 여기는 관념에 지배된다. 사람의 몸에 집착하면서 신통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법보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내가 말할 필요도 없이 발정념을 하면 된다. 맞다, 바로 발정념이다. 나는 더 깊이 발정념의 함의를 체험했다. 발정념은 바로 구결을 염하여 신통을 움직임으로써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아울러 우리가 운용하는 것은 한 가지 법보만이 아니라 없는 것이 없으며 생각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온다. 이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서 이 특수한 역사시기에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이 우둔한 도제(徒弟)들은 이것을 쓸 줄 모르고 지금까지도 형편없이 박해 당하고 있다.

『제공전(濟公傳)』에 승상부를 크게 소란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진(秦) 모가 제공에게 주리를 트는 형벌을 가하게 했다. 제공은 다리가 주리에 끼어졌지만 도리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보고도 못 본 체 하면서 낡은 부채를 집어 들더니 진모를 가리키며 “형을 가하라(上刑)”하고 고함을 지르자 “아이쿠” 하고 진모가 비명을 지르며 다리가 아파 절절 맸다. 제공이 또 소리를 질러 “형을 가하라”라고 하자 진모는 “쿵”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주리에서 고문을 당한 것은 분명 제공인데 도리어 그가 신통을 펼쳐 형벌을 단숨에 형벌을 가하는 자의 몸에 전이되게 한 것이다. 또 제공의 심태를 보면, 그는 태연하게 먼저 “형을 가하라”고 외쳤다. 그는 형구가 그에게 절대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여겼으며 사람의 관념이 없었고 두려운 마음이 없었으며 바른 믿음이 아주 확고하여, 속인의 일체가 그를 지배하지 못했기에 공능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진작부터 우리에게 일체 신통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도리어 사람의 생각을 고수하면서 마음대로 운용하지 못했고 아직도 사악에게 박해 당하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기대에 너무도 어긋나며, 이곳의 중생구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했다. 특히 오늘까지도 우리가 여전히 사람을 버리고 신으로 걸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법을 훌륭히 실증할 수 있겠는가? 가령 우리가 모두 사람의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 마음의 일체 집착을 놓아 버리고 생사에 집착이 없다면, 어디로 가면 어디에 가서 진상을 알릴 수 있고, 정념을 발할 수 있으며, 충분히 신통을 운용하여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사악을 해체할 수 있는데 매 대법제자마다 모두 이러한 정념이다. 박해를 승인하지 않으며, 낡은 세력의 일체 안배를 승인하지 않으면 사악이 어찌 감히 우리를 붙잡을 수 있겠는가? 아마 두려워 숨고자 해도 숨을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관건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층층 사람 껍질을 찢어버리고, 관념을 타파하여 진실한 본성으로 돌아오며, 더 이상 마비되지 말고, 더 이상 관념에 대체되거나 지배 당하지 말며, 더 이상 금 사발을 들고 밥을 빌지 말고, 여의봉을 들고 때리며, 관념을 전변시켜 진정으로 신통해져야 한다. 더는 사부님께서 기다리시게 하지 말자,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신의 일면을 부활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현재 층차에서의 체험이므로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부족한 곳이 있다며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7월 1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7/17/15901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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