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6월 15일] 최근 한 시기 많은 지방의 자료점들이 파괴를 당하고 많은 동수들이 불법(不法)적으로 잡혀가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나타났다. 박해가 발생한 후 동수들은 박해를 받게된 원인을 찾고 안을 향해 찾았는데, 원인이 매우 많았다. 그 중 여러 차례 제기되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환희심과 과시심이다.
무엇 때문에 환희하고, 무엇을 과시하는가? 환희심과 과시심의 등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고 깊이 파헤쳐보았다. 여기에서 나는 자신의 현 단계의 인식을 이야기하려 한다. 부족한 곳에 대해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 환희하고 기뻐하는가? 곧 응당 얻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얻었을 때이다. 만약 얻은 것이 응당 얻어야할 것 보다 적으면 풀이 죽고 실망하며 기뻐하지 않는다. 만약 얻은 것은 응당 얻어야 할 것이었다면 마음이 평정되고 환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론에 따라 추리한다면 형세가 갈수록 좋아지고 환경이 갈수록 완화되고 우리들이 하는 일 또는 항목이 약간의 좋은 결과가 있게 되면 곧 환희심이 생겨 사람의 마음이 들떠 움직임을 초래하는데 잠재의식 중에 아직도 박해가 발생함은 필연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또 환경이 이처럼 개선되었고 지금의 이러한 결과를 얻었는데 이미 매우 괜찮다고 인식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실질상에서 의연히 박해를 동일시하고 박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박해는 발생하지 말아야 하며 대법제자는 감금당하지 말아야하고 세인은 모두 정면으로 대법을 알게 되며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응당 있어야 할 상태이다. 우리들의 책임과 사명을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잘 해야 할 일은 아직 너무도 많은 것으로 맡은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아직도 먼데 어찌하여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일종 상황은 곧 자신이 매우 큰 성적을 해냈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에 대하여 어떻게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매우 많이 해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이 그 무슨 능력, 인내가 있어서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겨 우쭐거리며 뽐내지 말아야한다.
실질상에서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셨으며 대법의 위력인 바 이런 것들을 자신의 공으로 돌려세워서는 안 된다.
이미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가? ‘많고’, ‘적음’을 어떻게 가늠하는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한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했다고 생각할 때 조금만 하고서도 매우 많이 했다고 느낀다. 자기가 한 것이 자신의 몫으로서 응당 잘 해야 할 일임을 명백히 알았을 때는 얼마나 많이 했음을 막론하고 자신이 한 것이 부족하지 않을까 근심하며 자신이 응당 해야 함을 원만히 완성하지 못했을까봐 몹시 우려한다.
때로는 우리들은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모모 수련생은 대법을 위해 매우 많은 일을 했다.” 이것을 만약 “모모 수련생은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많이 했다.”라고 고치면 함의는 아주 다르다. 전자는 마치 한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대법을 위해 했다는 뜻이고, 후자는 일을 한 것이 법을 실증하는 일로서 역시 자신의 일인데 자신은 법 중의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약간의 성적을 취득했을 때 기뻐하고 위안을 느낄 수 있지만 환희는 아니다. 기뻐하고 위안을 느끼는 것은 “또 하나의 생명을 구하였다.”, “제자가 바르게 걸으면 사부님께서 적게 수고하시게 된다.” 때문이다.
과시심의 산생은 스스로 자신이 매우 잘 했다고 여겨 떠들어 대고 자꾸 과시할 때 배후의 의연히 명을 구하는 마음이며, 타인도 자아를 실증하는 사람의 마음과 동일시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중에서 과시심과 환희심을 따로 이야기 하셨는데, 이런 마음은 수련하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보아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을 품고 내려놓지 않는다면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 ‘내’가 또 무엇을 했고 ‘내’가 또 얼마나 많이 했는가이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많은 표현 뒷면의 집착심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근본적인 집착이며 낡은 우주 생명의 사(私)를 위하는 본성의 표현이다.
자신이 매우 많이 했다고 하여 스스로 매우 괜찮다고 여길 때 곧 환희심이 생기며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며 좋은 평판을 널리 받고 싶어 하여 곧 과시심이 나타나는데 좀 잘하고 좀 순리로우면 기뻐하고 좌절당하거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곧 실망하고 기가 꺾인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안전에 주의하지 않고 수구에 유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거둔 성적에 착안하면서 급히 성과를 확대하려 하여 또 일한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해야 함과 심성을 수련해야 함은 소홀히 한다. 더 내려가면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동수 사이에 간격을 조성한다. “과시심, 게다가 환희심은 마(魔)에 이용당하기가 가장 쉽다.”(《정진요지》) 곧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하여 사악이 우리에게서 박해하는 구실을 찾는데 그것들의 위험한 박해는 너무도 큰 것이다.
그것을 정시하여 그것을 수련해버려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정념을 확고히 할 때, 당신이 그것을 배척할 수 있을 때 나는 조금 조금씩 당신에게서 떼어 내준다. 당신이 얼마만큼 해낼 수 있으면, 나는 당신에게 그 만큼 떼어내고 당신에게 그 만큼 제거해준다.”(《2004년 시카고 법회에서의 설법》)
문장완성 : 2007년 6월 14일
문장발표 : 2007년 6월 15일
문장수정 : 2007년 6월 20일 19:18:45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6/15/15691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