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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속에 용해되면 신이 될 수 있다

글 / 산서성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6월9일】 사부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최후에 하면 할수록 더욱 잘하며 절대로 태만하지 말고 절대로 해이해지지 말며 절대로 마비되지 말기를 희망한다.”(《로스앤젤레스시 설법》)고 말씀하셨다. 우리 많은 수련생들은 십 년간 모진 역경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힘들게 걸어왔다. 지나간 10년 간의 수련경력은 약간의 위안과 허다한 아쉬움, 그리고 적지 않은 후회를 남겨주었다.

오늘날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땅에 엎드려 하늘과 사람을 원망할 것인가? 제자리에 서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를 것인가? 아니면 어디에서 넘어졌다면 재빨리 일어나 정법노정을 바싹 따라 용맹정진할 것인가? 최후일수록 정념이 더욱 강해야 하는가? 아니면 더 게을러져야 하는가? 최후일수록 법공부를 더욱 잘해야 하는가? 아니면 임무를 완성하는 식으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법공부해야 하는가? 최후일수록 정념이 더욱 강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잡념이 자라게 해야 하는가? 견고한 반석과 같이 비바람이 몰아쳐도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마음이 부평초와 같이 바람이 불기만 하면 바람따라 떠돌아다녀야 하는가? 잡념, 게으름, 느슨함, 마비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청성함, 정진, 움직이지 않는(不動) 마음, 충족한 정념은 또 어디에서 오는가?

전자(前者)는 속인의 천 백 년간 뼈속에서 형성된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관념에서 나오고, 후자는 법공부, 법공부, 또 법공부하는데서 나온다. 머리에 온통 법을 담았고, 법속에 용해되어 사람의 마음이 없으며,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사람의 정념, 신의 염두이면 머리속에 무슨 게으름, 느슨함, 마비, 자아보호, 위사위아의 잡념이 위치할 틈이 없다.

중공 사당(邪黨)은 일체를 마다하고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는 화려함을 만들어내고 있고, 올림픽과 평화의 형상으로 자신을 분칠하면서 외부를 미혹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암암리에 인류의 존엄성을 짓밟고 반인륜적인 무서운 죄행을 저지르고 있다. 중국의 인권 상황은 개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계속 악화되었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 중공 사당은 11가지 유형의 43종의 사람들에 대해 박해를 더 강화하고 있다. 대법제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우리 대법제자의 첫 일념(一念)은 무엇인가? 습관적으로 “조심해야 한다”,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숨고 피하고 법실증을 하지 않거나 적게 하며 진상 알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안전만 구하려고 하지 않는가? 손실을 적게 받고 마난을 당하지 않거나 적게 받으려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으로 청성하게 자신의 사전의 서약, 역사적 책임을 인식하고 자신과 주위의 동수들을 일깨워주면서 법에서 정진하고 실수(實修)하도록 주의를 주고 법에서 한 마음으로 안을 향해 찾고 법에서 정념정행 함으로써 사악에 의해 어떠한 틈을 타지 않고 법에서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도록 일깨워 주고 있는가? 우리는 속인사회에서 발생한 일체의 변화가 모두 정법의 노정을 따르고 있으며 대법제자의 법실증 가운데서 산생되고 변화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삼가 본말(本末)을 뒤바꾸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실제상 속인사회에서 발생된 일체의 일들은 오늘날에 있어서 모두 대법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촉성(促成)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비록 낡은 세력이 존재하여도, 당신들에게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방법이 없다.”(《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

마침 우리 대법제자들에게 아직도 제거하지 못한 집착심들이 많아, 마음에 따라 연화된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사람 귀로 들리는 현상과 가상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왜 당신에게 보이고 들리는가? 당신은 또 어느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했는가? 지금에야 비로소 폭로되어 나옴은 당신으로 하여금 뿌리에서 파내라는 것이 아닌가? 이점에서 볼 때 우리의 일사일념은 얼마나 중요한가. 사부님께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당신들은 혹독한 시련을 거쳐 걸어온 것으로 절대 마음이 바람만 불면 따라서 흔들리는 부평(浮萍)처럼 되지 말아야”(《소설『창우겁(蒼宇劫) 』에 관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에 의해 새로운 마난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낡은 세력이 배치한 마난을 승인하게 되고,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악성 순환에 들어가면 마귀굴을 돌파하기 아주 어렵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법제자 당신이 원만의 최후 일보까지 걸었어도 되고 안 되고를 고험 받는다.”란 이 한 층의 법리를 잘 알아야 한다. 더욱이는, “물론 낡은 세력이 배치한 모든 이 일체를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물론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이 일체를 우리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대법제자는 더욱 마땅히 더 잘해야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수련 중에서 마난에 부딪힐 경우 자신을 닦아야 하고 자신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낡은 세력이 배치한 마난과 그것들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어떻게 잘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다.”(《2004년 시카코 법회 설법》)라는 말씀을 더욱 청성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낡은 세력과 낡은 세력이 기어코 유지하려는 최후의 이번 박해를 부정해야 한다. 낡은 우주의 그 난잡한 귀신들은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고험하는가, 얼마나 엄준하고 얼마나 관건적인 고험이든지, 우리는 모두 철저히 부정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수련인의 일념이 그릇되면 사악에게 틈을 탈 기회를 주게 되므로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오로지 정념이 강하여 신의 길을 걷는 수련인 만이 사악한 낡은 세력에게 빈틈을 주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중시하는 것은 정념이다. 정념이 아주 강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모두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수련인이고 당신은 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며, 당신은 속인 요소와 저층 법리에 통제당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로스앤젤레스시 설법》)

대법제자의 이후의 길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다. 사부님을 단호히 믿고 대법을 단호히 믿어야 한다. 과거에 사부님의 이 한편의 설법을 배웠을 때 간단하게 표면 문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대조하는데 머물렀다. 사부님께서 낡은 세력이 배치한 모든 이 일체를 승인하지 않는데, 나는 당연히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입에서만 감성적으로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일체를 승인하지 않음이 아니다. 자신이 이성상에서 더 깊이 가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를 깨닫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들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일체를 어떻게 가서 철저히 부정하겠는가?

현실 생활 속에서 일단 사악의 박해에 부딪치면 항상 나오는 첫 일념은 신의 정념이 아니라 습관성적인 사람의 사유에 고정되어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두 귀로 들리는 가상 속에 들어간다. 속인 중의 환경 형세에 좌우지되어 흔들리는 사람 마음에 이끌려 생각하고 일을 행한다. 무슨 사악이 어떻게 하려고 한다. 무슨 민감일이 곧 다가온다. 피해야 한다는 등등이다. 사상 정념이 점차 강대해져 신의 일념이 나올 때 비로소 바르지 못한 사람의 염두를 바로 잡게 됨을 인식해야 한다.

왜 첫 일념은 항상 사람의 바르지 못한 염두일까? 이는 사람이 일생 동안 장기간 형성한 위사위아, 자아를 보호하는 의식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 이는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여 법속에 융해되지 못함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이 일념지차가 사람과 신의 차이 이다.

일에 부딪쳐서 나오는 첫 일념은 신의 정념이 나오게 하여야 하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실질적인 수련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정념은 법공부, 법공부, 또 법공부한 가운데에서 나오고, 이 정념은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음에서 나온다. 위사위아의 명리정을 제거하고 제거하고 또 제거하여 나온 것이다. 근본상에서 천 백 년동안 속인의 뼈속에 형성된 사람의 관념을 개변해야 하며 이로써 신의 사람 마음이 없어짐에 도달한다!

대륙의 현재 상황을 마주하여, 부동한 층차 부동한 상태의 대법제자와 대법 수련생을 놓고 말하면 그 감수와 견해는 다르다. 일부는 자신이 사부님을 도와 세간에 와서 중생을 구도한다는 위대한 이 일념을 수시로 지키고, 신의 표준으로 정정당당하게 생각하고 일을 행한다.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낡은 세력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 있는 있는 힘을 다해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있다. 이는 아주 이성적으로 법에서 수련하는 것이며 이지가 없이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는 사람과 신의 두 가지 개념의 인식 중에 있어 서로 부딪치고 있다. 한 동안은 사람의 정념이고 신의 사상이 위세를 차지하여 마음이 담담하다가, 한동안은 사람의 사유에 머물러 문제를 생각하고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진실로 여기며 사람의 사상이 위세를 점해 좌우로 흔들린다. 일부는 천 백 년동안 형성된 사람의 관념을 돌파하지 못해 현실 생활 속의 가상에 미혹되어 좌우지 되고 마음이 번잡하여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한다. 한 손에 신을 잡고 한 손에 사람을 잡고 헤어지기를 무척 아쉬워한다.

한 수련자가 만약 대법의 요구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마음이 움직인 것이고 낡은 세력의 배치를 인정하고 부합하고 승인하고 좌우지 당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데 이는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큰 잘못이다.

비록 낡은 세력의 배치가 질서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사부님의 배치는 더욱 질서 있다. 아울러 우리 매개 대법제자의 배후에는 모두 자비하신 사부님의 법신이 보호해 주고 계신다. 낡은 세력이 만들어낸 마난 표현 앞에서 마음 속으로는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근본상에서 우주의 진선인 표준에 따라 자신의 일사일념을 여과하고 대법으로 자신을 바로 잡고 자신을 순정하게 하고 사람 마음이 없는 신이 되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이 바로 신(神)이며 당신들이 바로 미래의 부동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인데, 당신들이 누구를 바라겠는가? 중생들은 모두 당신들에게 희망을 기탁하고 있다! 정말로 이러한 것이다.”(《2002년 미국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그렇다! 중생들은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 대법제자들이 어찌 금사발을 들고 가서 중생을 향해 동냥할 수 있겠는가!

문장완성 : 2007년 6월9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6/9/156453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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