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6월 5일] 어제 나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을 읽을 때 사부님이 하신 이런 한 단락 말씀을 보았다.
“무엇 때문에 현재 책을 보는 것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는가? 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가 높아진 것이며 대법제자는 반드시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해야 비로소 제고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조기(早期)에 법공부를 하던 사람은 나는 집에서 책을 본다고 말하는데, 바로 대법제자가 나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사오(邪悟)와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오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도 좋은 축에 속한다. 이 몇 년간 대법제자들은 모두 박해를 받는 중에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진상을 알리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집에서 책을 보든지 간에 여전히 어떠한 제고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비단 제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아래로 내려갈 수 밖에 없다”.
보고난 후 나는 아주 진감되었다. 이전에 이 단락을 한 번만 읽은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중시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이 한 단락 시간을 회고해 보니 날마다 저녁이면 동수와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하였고, 매주 한 두 번씩 자료 배포를 하였으므로 자신은 아주 정진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마음이 아주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사부님의 요구와 비겨보니 원래 거리가 이렇듯 컸다!
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법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자신이 박해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개인이 제고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중생을 구도하고 조사정법 하기 위해서인가? 사부님은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신수련생을 제외하고 사부는 99년 7.20 이후에 당신들에게 어떠한 개인의 수련하는 고비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개인 수련은 전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을 반성해 보자, 아직도 개인수련에서 중생구도로 바뀌지 못한 것이 아닌가? 만약 다만 대법에 동화되어 도태되지 않는데만 만족한다면 그건 아직도 낡은 우주의 “사(私)”가 아닌가 ?
여기에서 법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법공부를 하는 목적이 중생을 구도하고 조사정법하기 위해서인데, 이 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중생구도는 자료나 배포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해야 하며 반드시 잘해야 하거니와 진정으로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야 하며 “중생구도를 당신들 현재 생활의 매 한 가지 일 가운데 관통시켜야 한다.”(《2003년 아틀란타법회 설법》)
건의하건대 법공부 팀에서는 시간을 잘 안배하여야 한다. 더이상 “7 .20” 이전처럼 법공부에 대량의 시간을 점하게 할 수 없다. 세 가지 일을 하는 시간을 잘 안배해야 한다. 우리 사부님께서 《2007년 뉴욕법회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말씀, “현재 해야할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바로 어떻게 보다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가 하는 것으로 이 역시 현재 대법제자들의 원만 과정 중에서 완성해야할 일이다. 이것은 대법제자의 사명이며 마땅히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으로, 반드시 해야 하며 반드시 완성해야 할 일이다.” (《2007년 뉴욕법회 설법》)를 기억하자.
문장발표 : 2007년 6월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6/5/1562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