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7년 4월 25일】 우리는 속인 중에서 수련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에는 미시적인 데서부터 거시적인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생세세 형성한 각종 관념이 있어 우리의 본성을 덮고 있다. 또한 우리의 일체를 지배하는데 먹고, 입고, 살고, 행동하는 데에서부터 세계와 시간, 공간, 물질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 속에서 형성된 관념이다. 사존(師尊)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층을 나누어 제거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바르게 수련함에 따라 이런 것들도 끊임없이 제거되고 있다. 지금은 비록 대법을 수련하여 이 층의 법리를 깨달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 사상 중에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만약 정념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곧 그것에 의해 좌우지된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우리 많은 수련생들은 속인 중에서 수련하기 때문에 많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지만 많은 마음은 이미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한다.”(『전법륜』) 것과 같다.
최근 사부님께서는 많은 신경문에서 모두 ‘최후(最後)’라는 이 명사를 제출하셨는데, 목적은 우리더러 더욱 잘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수련생들이 지금 대화중에도 ‘최후’라는 이 말의 사용을 좋아하는 것을 보았는데 가령 “모두 최후에 도달했는데 아직도 어떠어떠하다”는 말을 한다. 마치 일체는 모두 말할 나위도 없으며 자신을 느슨히 해도 되는 것 같은데 사부님의 말씀을 좀 과격하게 이해했다.
시간에 대해 집착하는 문제 역시 늘 회자되는 말이다. 이전에는 언제 결속될 것인가에 집착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최후’라는 이 말에 집착한다. 어떤 수련생은 “모두 최후에 도달했는데 또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수련생들의 권고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 팽창하여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데 일을 함에 있어서도 이지적이지 못하다. 결국 자신에게 손실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동수들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모두 최후에 도달했는데 돈은 남겨서 무엇 하는가?” 이리하여 가정의 모순을 만들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사람의 관념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최후’란 말을 이해해선 안 된다. 또한 사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자체가 바로 우리에 대한 일종의 고험이다. 우리는 사람의 관념으로 ‘최후’라는 이 말의 함의가 바로 ‘어느 날’, ‘어느 달’, ‘어느 해’라고 이해해선 안 되며 이런 시간은 신(神)의 눈에는 도리어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럼 우리가 또 어찌 사람의 관념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최후’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화상의 수련은 일생동안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했으며 조금도 해이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십 수 년 수련하고서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면 이것이 맞겠는가?
사존께서는 “나는 말법시기에 우리 파룬따파 수련생들의 씬씽은 화상보다 높아야한다고 말한다.”(『파룬따파 의해』)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는 사존께서 요구하시는 씬씽에 도달했는지 자문해보았는가? 자료점의 돈을 낭비하고, 동수들과 투쟁하려는 마음을 지닌 그런 사람들은, 잠재의식 중에 최후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느슨하게 한 원인은 아닌가? 사람의 관념 속에는 희망이 있으면 실망이 있고 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그럼 우리가 수련 중에서 어떤 결과에 집착할수록 이 결과에 이끌리기 쉬우며 이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면 곧 정념이 약해지고 사람 마음이 올라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을 잘해내지 못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또 스스로 의기소침해진다.
개인의 깨달음에 의하면 우리가 착실하고 착실하게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착실하고 착실하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3가지 일을 하되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일체는 모두 그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4월 2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4/25/15343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