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이요찡(曉淨)
[명혜망 2007년 3월 23일] 대륙의 어떤 동수들, 특히는 젊은 제자들은 법리상에서 비교적 깊은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공산당의 무신론의 교육을 받아 행동 상에서 진정으로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는 것을 중시하지 못한다. 내가 곧 그에 대한 한 예다.
나는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부처를 공경하는 것을 보고는 미신이라고 웃었다. 법을 얻은 후 미신이 아님을 명백히 알았으나 마음 속으로는 종래로 부처를 공경하는 것과 사부님의 법신상을 모시는 것은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은 행위상에서부터 진정으로 바르게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은 기공의 형식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은 사상 속에 부처를 공경한다는 개념도 없으면서 자신은 스스로 집착하지 않고 속인의 형식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상 이것은 결국 공산악당이 부어넣은 사상영향을 받은 탓에, 늘 “봉건예교(封建禮敎)의 속박을 돌파하자.”고 하면서 전통적인 문화를 파괴하고 극단적 자유를 추구하고 선배와 후배 사이에 이른바 ‘평등, 민주’를 추구하는데 사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게 하고(君不君),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게 하고(臣不臣),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게 하며(父不父),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게(子不子) 하여 예절교육 방식을 모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점차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는 중요한 의의를 인식하고 있다. 대법은 위엄(威嚴)한 것으로 천상의 신들은 사부님에 대하여, 법에 대하여 내심으로부터 또한 행위 상에서를 막론하고 무한히 공경하고 우러러본다.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는 것은 대법제자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이며 한 층의 법이다. 조금은 합당치 않지만 예를 든다면, 한 아이의 부모가 종래로 자녀의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윤리 중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미덕이다. 이를 인식한 후 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도 주의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대법책을 적당한 위치에 잘 놓아두거나 사부님의 법신상을 모시는 등이었다. 점차 나는 자신의 정념이 가강됨을 느끼게 되었는바 보건대는 큰 일 같진 않지만 나로 하여금 사부님께서 나의 신변에 계시고 있음을 시시각각 생각하게 하였다. 정법의 노정은 곧바로 신속하고 세차게 추진되고 있기에 나는 감히 느슨하게 하지 못하고 태만하지 못한다. (비록 잘하지 못했으나 매우 큰 개선은 있다.) 수련하지 않는 남편이 나의 변화를 보고는 처음에는 우스워했다. 후에는 점차 대법에 대한 경의가 나타나면서 더는 되는대로 대법과 사부님을 평론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동수 역시 그러했다. 그녀의 남편은 비록 대법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냥 완전히 접수하려 하지도 않고 늘 그녀와 도리를 따지길 좋아했다. 이 수련생이 출국한 후 월세 집으로 들었는데 집주인 역시 대법제자여서 집에서 사부님의 장엄한 큰 법신상을 모셨고 책상에는 대법서적이 잘 정돈되어져 있었다. 동수의 남편이 부인을 보러갔다가 이러한 정황을 본 후 매우 큰 진동을 받았는바 그 후부터는 태도가 매우 많이 개변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인식했다. 반드시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는’ 이 층의 법을 수호하고 자신의 언행과 관념을 바로 잡아 낡은 세력이 박해 할 수 있는 구실을 찾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부님을 공경하면 동시에 수시로 자신의 정념을 확보할 수 있으며 대법의 위엄과 수승을 인식할 수 있는바 더욱 정진할 수 있다. 동시에 대법제자 자신이 잘하면 속인에 대해 영향을 일으키는데 속인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우러러보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바 역시 그들을 구도한다. 나는 이 문장을 써내어 나와 마찬가지인 동수들이 진정으로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성문 : 2007년 3월 22일
발고 : 2007년 3월 23일
갱신 : 2007년 3월 23일 03:13:29
원문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3/23/15133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