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목자와와(木子娃娃 대륙 역주: ‘목자와와’란 木+子=李의 아이란 의미로 리 스승님의 제자라는 뜻)
【명혜망 2007년 2월 25일】명혜 사이트에서 늘 전통문화 이야기 등에 관한 문장들을 보게 되는데 나는 이런 것들은 대법이 사람이란 이 층에서 이치의 체현으로써 사람이 되는 윤리 도덕도 정법 중에서 바로 잡혀야함을 깨달았다. 대법제자는 속인사회를 떠나서 수련하지 않고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 가정환경이 있다. 가정환경 속에서 어떻게 바르게 행하는가는 현재 집 안의 중생을 구도하는 관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방면을 미래에 남겨 참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사이트에서 동수의 수련체험 문장을 보고 주위 수련생이 가정모순을 겪을 때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는데 오늘 자신의 생각을 써내어 교류하고자 한다.
내가 볼 때 동수들이 가정 모순을 넘길 때 아주 많은 원인은 바로 자신의 후천적으로 형성된 윤리관념이 정확하지 않아 모순이 발생하거나 길어지며 반복되거나 혹은 복잡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한 가지 견해를 설명해본다. ‘효(孝)’를 예로 들겠다. “백가지 선행 중에 효가 으뜸이다(百善孝为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잘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만 효라고 할 수 있을까? 내 기억에 공자는 그의 제자가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효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란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것 같다. 대체적인 뜻은 부모가 만약 잘못을 저지르면 자녀로서 부드러운 태도로 설득해야 한다. 부모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모두 한결같이 효도해야 한다. 부모님께 음식물을 공양하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효도와 존경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며 가장 어려운 것은 ‘색난(色难)’이다. 다시 말해 부모님께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성인 공자가 사람들에게 세워준 자식 된 도리이다.
옛 사람들은 효도 방면에서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자(漢字)중에 노인을 형용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모질(耄耋)’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80세 이상의 노인을 ‘질(耋)’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70까지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70세 이상의 사람을 일러 ‘고희지년(古稀之年 역주: 예부터 드문 연령이란 의미로 사람이 70을 넘게 살기 어렵다는 뜻)’이라고 한다. ‘모(耋)’란 글자는 고서에 구체적인 해석이 있는데 바로 손가락으로 가리킬 ‘지(指)’이다. 사람이 7,80세가 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하고 싶으면 손가락으로 자손과 젊은 사람들에게 가리켜 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자의 내포가 얼마나 깊은가, 단 한 글자로 효행의 도리와 노인들이 향유해야 할 권리, 자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대(漢代)에 노인이 고희지년(古稀之年)에 이르면 관부에서는 옥수장(玉手杖 역주: 옥으로 만든 지팡이)을 주었고 옥에는 뻐꾸기를 조각했다. 옛 사람들은 뻐꾸기를 목이 막히지 않는 새라고 불렀는데 노인이 음식물을 섭취할 때 목이 메지 말 것을 축복하는 의미이다. 또한 자손들이 노인에게 죽과 같은 맛있고 무른 음식을 대접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고로 중국에서는 각 조대(朝代)마다, 위에서 아래로, 천자에서 서민까지 유가사상을 준수했고 효행을 제창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효를 행할 수 있다면 반드시 나라에도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성조(聖祖) 강희황제는 ‘천수연(千叟宴 역주: 노인 천명을 모시는 잔치라는 의미)’을 베풀어 모질(耄耋) 노인 천명을 청하여 노인을 존경하고 효를 다할 것을 제창했다.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을지 가히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럼 사람이 만약 그 도를 거슬러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불효(不孝)이다. 한 사람으로서 불효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으로서 편안히 살아갈 자본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상의 신과 지상의 사람 그 곳에서는 이미 그를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백년 후 더 이상 사람으로 환생할 수도 없다.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 만약 불효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의 존엄에서 말할 때 가장 큰 치욕이다. 사람의 종말로부터 말해도 아주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 대륙에서 널리 쓰이는 사전인 《현대한어사전(现代汉语词典)》 속에서 ‘질(耋)’은 이미 고대의 뜻을 찾을 수 없다. 단지 “7,80세 연세의 노인을 가리킨다”라고만 해석했다. 이 문장을 통해서도 악당(惡黨)이 전통문화 윤리도덕에 대한 파괴를 엿볼 수 있다.
다시 ‘윤(倫)’자를 보면, 번체(繁體)의 ‘윤’자는 왼쪽에 사람 인(人)의 형상이 있고 오른 쪽에 ‘一冊’이다. 책(冊)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책 속에는 물론 규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이 ‘윤’리 방면에서 책 속에는 설법과 규칙이 있으며 제멋대로 한다는 설법이 없음을 표시한다. 옛 사람들은 “규구(规矩)가 없으면 방원(方圓)을 이룰 수 없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방원은 천지(天地)를 뜻한다. 고대 사람들은 땅을 네모(方)로 보고 하늘을 둥글게(圓) 보았다. 하여 천지를 ‘방원’이라고 일렀다. 그러므로 위 문장에서 윤리규칙(規矩)을 천지와 똑같이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윤리규칙을 얼마나 크게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형상의 각도에서 보자면 인(人)자의 아래 글자는 마치 ‘울타리(栅欄)’와 같다. ‘울타리’란 난간으로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윤’리에서 넘을 수 없는 규칙이 있는데 ‘울타리’가 막고 있음을 표시한다. 사람이 만약 함부로 ‘울타리’를 넘으면 번거로움을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재앙을 입는다.
악당이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할 때 한마디 구호를 높이 외쳤다. 바로 “봉건 예교(禮敎)가 사람을 압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교란 바로 공자를 대표로 하는 유가 사상이고 천지 사이에서 사람에게 세워 준 사람이 되는 규칙이다. ‘윤리강상(倫理綱常)’, 이는 천백 년 간 중화 정통의 도덕관념과 전통적인 사상문화의 기점이자 원천이다. 악당은 그것이 “사람을 눌러 죽였다”고 모함했고 바로 사람들이 사람이 되는 규칙의 범위에 있지 않게 하려고 했으며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게 하려고 했다. 먼저 문자에서 ‘인륜’의 그 ‘일책(一册), 그 ’울타리(栅栏)‘를 비수(匕)로 없애 ’윤(伦)‘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그것의 서적, 문물, 고서 등을 중화대지에서 불태우고 제거했는데 사람의 사상 중에서 제거해 버렸다. 사람으로 하여금 무법천지가 되고 제멋대로 행하고 충효절의를 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은 사람을 귀신, 짐승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규칙과 속박이 전혀 없다면 정말로 자유로운가? 정반대로 사람은 무지 속에서 겹겹의 죄업을 지을 것인즉 밧줄로 자신을 층층이 묶어버리는데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살아도 각종 병업과 재난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은 후에는 또 무거운 죄업에 이끌려 지옥과 악도(惡道)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예교규칙을 모르는 사람은 신의 눈으로 볼 때 이미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의 그 변이된 사상과 사람으로서의 표준은 이미 지옥 아래로 내려갔다.
과거를 돌아보면, 중화대지에서 악당이 나라를 찬탈하기 전 ‘유불도’ 3교는 비록 모진 역경을 겪긴 했지만 오히려 매몰되지 않았고 인류 문명에서 찬란한 빛을 뿌렸다. 중화문명의 노정에서 공자는 먼저 사람에게 사람이 되는 예교를 정해주었다. 이후 한대(漢代)에 와서 부처님이 황제의 꿈속에 나타나 황제가 사람을 파견하여 불교를 중국에 들여오게 했다. 또한 중토 대지에서 광대한 민중들은 먼저 사람이 되는 규칙을 안 후 다시 더 높은 사람의 층차를 향해 수행했던 것이다.
《신선전(神仙傳)》의 기재에 의하면 여동빈(呂洞賓)이 전에 사부인 한종리(漢鐘離)한테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도를 얻으신 지 1100여 세에 왜 제자 한 명만 제도합니까? 우리 도문(道門)은 자비롭지 않아 중생 구도를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의 사부는 듣고서 크게 웃었다. “얘야, 너는 이 세상의 사람을 아느냐? 불효자가 많고 불의(不義)한 자들이 많은데 이 불인불의(不仁不義)한 자들이 어찌 신선이 될 수 있겠느냐?” 여동빈은 믿지 않고 사부에게 바다를 건너 한번 다녀오면서 3천명을 제도하겠다고 했다. 그의 사부는 크게 웃으면서 허락했지만 그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여동빈의 명언을 알고 있다. “동물을 제도할지언정 사람을 제도하지는 않겠다.” 그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 사부 앞에 꿇어앉았다. 자고로 어떠한 수련 법문이든 지간에 불효(不孝)하고 불의(不義)한 사람은 원만할 수 없었고 도가 법문에서는 더욱이 이런 유의 사람은 심지어 문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오늘날 대법의 자비와 사존(師尊)의 호탕하신 불은(佛恩)으로 친히 이곳에 오시어 아주 깊이 미혹된 중생을 구도하시며 표면을 보지 않고 사람마음만 보신다. 공의 연화에 있어, 미시적인 데서 표면의 거시적인 데로, 우리의 신체를 개변시키고 지금은 정말로 이미 표면까지 개변되었다. 유가 사상은 대법 속에서 가장 표면적인 한 층의 법리이고 또한 대법 속에서 바로 잡혀야 한다. 현재 대법제자가 하고 있는 일체, 그림전, 미술전, 거리 퍼레이드, 꽃차, 천국악단 공연, 기세등등한 신당인 성탄절 공연, 스펙태큘러의 추진과 공연, 이 모두는 인류의 가장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도덕과 문화의 박대정심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문예, 문화의 형식으로 중생을 구도할 뿐만 아니라 또 사람의 가장 표면적인 한 층의 법리를 바로 잡고 있는 것이다. 미래인에게 기초를 다져주고 사람 이 한 층에 각종 참조를 남기고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하라고 하신 일체는 모두 표면의 한 가지 혹은 몇 가지의 목적이 아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단지 아주 적은 한 점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정법이란 큰 연극 공연은 5천년의 파란만장하고 휘황찬란함을 연출했고, 대법제자의 신년 스펙태큘러는 선악(仙樂)이 유유히 흐르고 색다른 광채를 뿜고 있다. 대법제자가 한 일체는 크기로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작기로는 소리 없이 사물을 적시고 있다. 소리 없이 사물을 적신다는 것은 몸이 속인사회, 가정환경 속에 있는 대법제자들이 보기에는 마치 평범하고 미미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정념정행 하며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큰 연극은 지금 공연 중이고 무대 위의 극도 상연되고 있다. 속인사회와 생활환경 속에서 대법제자의 연극 역시 계속 공연되고 있다. 천상의 신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다. 돌이켜 이 글의 제목 “윤리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를 다시 구체적으로 말해보도로 하자.
가정에서 노인이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말해보자. 우리가 천륜(天倫)의 즐거움을 말하면 손자가 노인의 주위를 맴도는 따뜻한 화면을 떠올린다. 아주 많은 가정에서 손자는 늘 노인이 돌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 사람의 그 곳에서는 자녀가 아이들을 노인에게 맡김은 노인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지 노인을 피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인이 아이를 좋아하기에 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지 조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앞에서 나는 이미 ‘질(耋)’의 의미를 말했다. 때문에 부모로서 아이의 장난기가 노인을 피곤하게 하지 않도록 시시각각 교육하고 또 주목해야 한다. 노인이 피곤하면 아이를 데려오고 노인이 휴식하게 해야 한다. 과거에 여인은 집에서 가사 일을 했고 돈 있는 집안에서는 사람을 고용해 육체적인 일을 시켰다. 돈이 없는 집에서는 가끔 여인도 밭에서 일을 할 때 아이를 노인한테 맡기기도 했지만 그 속의 도리를 알고 있었는데 바로 노인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노인에 대한 효심과 감사의 은혜가 더해진다. 그렇다면 노인에 대한 보살핌은 정신적으로 노인으로 하여금 위안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천륜(天倫)이 화목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렇지 않다. 자식들은 노인이 자신을 위해 아이를 보살피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되었고 보살펴 주지 않으면 일부는 노인에게 좋지 않은 기색을 드러낸다. 그 또한 공자가 말한 노인에게 좋지 않은 기색을 드러냄이 불효라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마 이런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치원이 있어도 보내지 않고 아이가 억울함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효도를 전혀 모르고 표면만 본다. 한 세대 한 세대 모두 노인의 주위에서 자랐지만 배후의 윤리 내포를 모른다. 지금의 노인들 역시 아주 많은 이들이 이를 모른다. 그들이 젊었을 때 이미 악당(惡黨)이 폭란을 일으키는 어지러움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거리에서 두 할머니가 한담을 나누는 것을 들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날마다 손자를 보기 힘들지만 방법이 없어, 남들이 모두 봐주니 내가 봐주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비애를 느꼈다. 그 노인이 너무 가련하게 여겨졌는데 한평생 바삐 살았어도 ‘자식’에게 미안하단 말인가. 사람이 되는 윤리가 파괴되었고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고 대법제자의 가정 모순 속에도 이런 문제가 반영된다. 사이트에서나 주위에서 나도 이런 예를 보았다. 일부 노년동수들은 자식들의 아이를 보느라 피곤하기 그지없다. 하여 자신이 여기에 온 진정한 사명을 뒤로 놓는다. 일부는 아이를 봐주지만 며느리가 눈을 흘겨도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또 심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는 아이 때문에 노인과 모순을 일으키고 또 일부는 밖에서는 예의가 바르지만 집에 돌아와선 제멋대로 한다. 일부는 자신의 부모에게 또 말대꾸를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어차피 부모니깐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일부 동수의 집에서는 아이에게 가장 기본적인 예의도 가르치지 않는다.
사실 동수들은 다른 면에서 아주 잘 하고 있다. 나는 사람이 되는 이 문제에서 우리가 계승하고 교육 받아야 할 전통문화를 공산악당이 박탈했고 우리 사상 속의 윤리 관념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법 속에서 말씀하신 대로 한 대의 TV에 세탁기 부품을 넣으면 그 TV는 곧 망가진다. 그 악당이 사람에게 주입한 반(反)윤리의 변이관념이 바로 그 사상 속에서 제거해야 할 타락한 ‘부품’이고 그것이 제거되기만 하면 곧 좋아질 것이다.
그 관념의 형성을 찾아보면서 나는 한 가지 농담이 떠올랐다. 한 신사가 날마다 길을 다니면서 그 곳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을 한 푼 주었다. 거지는 습관이 되었는데 어느 날 신사의 몸에 돈이 없었다. 하여 그 거지에게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 거지는 내일 두 푼을 주면 된다고 했다. 그 거지는 신사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인의 많은 후천 관념들은 모두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자신을 바로 잡고, 신이 승인하는 윤리 표준으로 다시 그 속인의 관념을 돌이켜 보고 그것이 생긴 것을 보면 그 관념이 너무나 황당함을 느낄 것이다.
대법제자는 속인 중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에 속하는가? 변이된 관념으로 승인된 그런 좋은 사람인가? 노년동수로서 자식들을 위해 소와 말이 되어 자식들의 눈 흘김을 당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심성을 제고시키는 것인가? 내 생각에, 대법은 일체를 바로 잡고 있다. 대법제자는 마땅히 법속에서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하고 또한 내 주위부터 잘 해야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자식을 키우면서 가르치지 않으면 부모의 과실이다” 자신의 아들딸이 사람이 되는 윤리 규칙마저 모르고 효도를 모르며 일생동안 업을 짓는다면 부모로서 잘못이 없겠는가? 이전에는 악당의 파괴로 잘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법을 얻었으면서도 계속 그렇게 흐리멍덩하다면 안 된다. 대법제자는 손주를 봐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또 단지 자식의 눈 흘김 속에서만 심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자녀를 다시 교육시켜 효도를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자식에게 알려주고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나는 단지 ‘효’를 예로 들었다. 사실 부부 사이, 가족 구성원 사이에 발생한 많은 모순들은 대법제자의 바르지 못한 후천 윤리 관념을 향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일부 사람들은 가정 모순 속에서 자신의 후천적인 관념으로 시비를 가르고 일부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미끄러져 내려온 속인과 비기면서 마음의 평형을 찾지 못한다. 사실 자신의 윤리 관념이 잘못 되었고 마땅히 모순 속에서 바르지 못한 윤리 관념을 찾아 캐내어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 속인의 그 보편적으로 타락한 윤리 관념 속에서 심성을 제고한다는 이유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어떻게 심성을 제고해도 당신의 바르지 못한 윤리 관념이 계속 남아있기에 표면에서 보면 당신은 속인과 다를 바가 없다. 가정에서도 속인과 똑같고 심성은 ‘순정(純正)’한 표준에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일부는 잘못되었음을 이미 알지만 또 체면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내가 동수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것은, 악당 사령이 아주 많은 공간 마당에서 반(反)천리 반(反)인륜의 사악한 마당을 설치했다. 이 어두운 하늘 아래 특히 중화 대지에서, 전에는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자녀가 자녀답지 않은, 조상과 자손이 뒤바뀌고 음양이 뒤바뀌고 건곤이 거꾸로 돌아가는 어지러운 정경이었다. 현재 대법이 가장 표면을 바로 잡고 있고 이런 타락한 것들을 소훼(銷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자신의 사상 속에 바르지 못한 관념이 있어 그것에 따른다면 그것은 미친 듯이 박해를 강화하고 그것의 존재를 위한 구실을 찾을 것이다. 때문에 보기엔 크지 않은 가정 모순이지만 오히려 반복되고 끝없이 이어진다. 사실 죽기 전에 마지막 발광을 하는 마들이 우리의 바르지 못한 사상관념의 틈을 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법속에서 청성해야 하고 정념으로 자신의 사상 속의 바르지 못한 것들을 해체 시켜야 비로소 동시에 삼계 내 공간 내의 이런 타락한 마당을 해체시킬 수 있으며 속인사상 속의 바르지 못한 관념을 해체하여 사악을 깡그리 없애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작은 깨달음이니 적절치 못한 곳은 동수들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2007년 2월 25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2/25/14964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