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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쇠는 것’과 ‘춘절(春節 춘제)’ 쇠기

ㅡㅡ회답편지 2

글/육진암(陸振岩)

【명혜망 2007년 2월 8일】

중밍(仲明) 아우에게: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다. 내 편지를 진지하게 읽어 보았다니 참으로 기쁘구나. 아울러 네게도 독립적인 자신의 사유가 있는 것 같다. 편지에 말하기를 지금은 ‘춘절’ 을 쇠도 쇨수록 더 재미가 없고, 춘절 갈라도 흥미가 없으며, 떠벌려 먹고 마시고, 거리를 쏘다니며 물건을 사도 이전처럼 흥이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이것도 바로 내가 먼젓번 편지에 제기했던 또 다른 문제이다. ‘신년(新年)’을 ‘춘절’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단순한 명칭에 불과한 것 같지만 사실 설을 쇠는 가운데 포함된 중화 정통문화의 내포는 도리어 이로 인해 끊어진 것이다. 원래 있었던 문화적 내포를 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히 점점 더 흥미를 잃기 마련이란다.

전통적인 신년은 정월 초하루 하루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을 쇠는 것은 섣달 초파일부터 시작하여 정월대보름에 끝나는데 지금 서양의 ‘성탄절 휴가(Holiday Season)’보다 좀 더 길단다. 설을 쇠는 주요 내용도 서양의 휴가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데, 주제는 기본적으로 지난 일 년 동안 신명(神明)의 보우(保佑)에 감사를 드리고 오는 해의 복을 빌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통을 회고하는 등등 깊은 문화적 내포를 지닌 것이다.

섣달 초파일을 속칭 ‘납팔절(腊八節)’이라고 부른다. 이 날이 되면 곳곳에서 모두 납팔죽(腊八粥)을 마시는 풍속이 있단다. 민간에서는 전통 역법 중의 음력 12월을 섣달(腊月)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납(腊)’이란 옛날에는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납(腊)이란 합(合)이니 여러 신들에게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멀리 상(商)나라 시대에 중국에는 바로 천지, 신령, 조상을 함께 제사 지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를 ‘합동제사(合祭)’라고 불렀다. 1년 춘하추동 4계절에 4차례의 큰 제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겨울에 지내는 동제(冬祭)의 규모가 제일 컸다. 이런 제사는 옛날 사람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심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뜻을 말한다면, 한 해가 지나가는 때에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신명(神明)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동제는 흔히 12월에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周)나라 때부터 12월을 섣달이라 불렀고, 동제를 거행하는 날을 ‘납일(腊日)’이라고 불렀다. 납팔죽(腊八粥)을 마시는 풍속은 불교에서 온 것인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날 양치는 여인이 끓여준 죽을 먹고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얻어 성불(成佛)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 들어 온 후 섣달 초파일은 섣달의 중요한 명절로 되었다. 사람들은 납팔죽(腊八粥)으로 신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조상의 제사를 지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쌀과 과일을 섞어 쑨 납팔죽(腊八粥)도 은혜에 대한 감사와 다가오는 해의 풍작을 기도하는 의미를 대표한다. 북경 옹화궁(雍和宫) 안에는 아직까지도 몇 돈이나 되는 옛날 구리 가마가 있는데 옛적에 황실에서 납팔죽(腊八粥)을 끓여 주던 도구였다고 한다. 이날 절에서도 흔히 부처님 목욕을 시키는 욕불회(浴佛會), 경문 읽기, 죽 뿌리기 등을 거행했다.

섣달 초파일 후에는 섣달 이십삼일도 큰 명절이었다. 속칭 ‘작은 설(过小年)’이라고 부르는데 부엌신(灶神)을 모시는 날이다. 민간에서는 부엌신이 온 집안 식구들을 단속하다가 섣달 23일이면 보고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간다고 여겼다. 그후 섣달 그믐이 되면 다시 부엌신의 새 초상을 붙이는데 부엌신을 영접한다고 불렀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일체 일은 모두 신령이 장악하여 배치하며 단속한다고 믿었다. 부엌에 부엌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물에는 우물신이 있으며 문에는 문신이 있으며, 밭에는 또 토지신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신들은 각자 자기 책임에 따라 인간의 선악을 단속하는데 이런 신들을 마중하고 보내는 일을 모두 섣달 이십삼일부터 그믐 기간까지 거행했다.

섣달 이십삼일 이후, 이십사일 혹은 이십팔일에 대청소를 하는 풍속이 있다. 왜냐하면 이때 뭇신들이 하늘로 올라가기에 평소에 감히 움직여 청소하지 못하던 곳을(어느 곳이나 없는 곳이 없는 신령을 함부로 할까 평소에는 청소를 못함) 이때면 시름을 놓고 청소할 수 있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설은 고조에 들어간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맞이하는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일은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다. 저녁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고 밤을 꼬박 새는 외에도 이날 점심부터 불당(佛堂)에 제물을 차려 놓고 초에 불을 붙여 향을 태우는데 이것을 속칭 기향(起香)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향불이 초닷새 까지 꺼지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천지 상(제사상을 말함)을 놓아 뭇신들이 하계로 내려오는 것을 맞이해야 하며, 문신을 붙이고, 부엌신 초상을 청하고, 춘련(春聯)을 붙이는 등은 모두 중국 사람들이 신을 존경하는 전통과 관계있는 것이다. 춘련의 원형은 원래 도부(桃符)[역주: 도부란 옛날, 정월(正月)에 복숭아나무로 켠 2장의 판자에 각각 ‘神荼’, ‘郁垒’의 두 문신(門神)을 그려 문짝에 붙여 악귀를 쫓던 부적을 말한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설에서 이르길 귀신은 복숭아나무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오대(五代)때 와서 서촉(西蜀)의 왕 맹창(孟昶)이 도부에다 “신년납여경, 가절호장춘(新年納余慶,嘉節号長春)”이라 쓴 것이 정식 춘련의 발단이 되었다. 조상에게 제물을 차리는 것도 그믐날 밤에 하는 내용의 하나로 되었다. 이것은 옛 사람들의 효에 대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전통 도덕을 계승한 표현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 이 날은 노소를 불문하고 새벽에 일어나 옷을 단정히 입고 향을 태우고 폭죽을 터뜨렸다. 대문을 활짝 열고 과일, 차, 술을 대청에 차린 후 천지, 조상에게 절을 하는데 이를 “신년개문대길(新年開門大吉)”이라 부른다.

설 명절기간에는 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묘회(廟會 역주: 예전에 명절 때 사찰에서 열리던 시장), 창극(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지방 연극이 있다), 용춤, 사자춤, 무술, 잡기 등등 활동이 있어 대단히 흥성했다. 명절을 경축하는 기분은 줄곧 정월대보름 원소절(元宵節)까지 계속 되었다. 정월대보름날은 전설에 의하면 도교 천관대제(天官大帝)의 탄생일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이날 천관대제의 출생을 축하하고 “천관께서 복을 하사해 주길” 빌었다.

전통적인 설 풍속은 중국 사람들이 천지신명을 존중하고 전통을 회고하는 짙은 분위기로 충만했다. 사실 여기에는 또 중화 정통문화의 핵심이 있다. 이런 문화 분위기는 옛 사람들이 겸손하고 만족하는 태도로 생활을 대하게 했다. 예를 들면 풍작을 거두면 사람들은 그것은 신령이 좋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어 준 것이라거나 조상이 선을 행하고 덕을 쌓은 것이지 “하늘땅과 투쟁한” 결과가 아니란 것을 믿었던 것이다. 때문에 더욱더 신령을 겸손하게 존중했고, 착한 일을 더 많이 했던 것이다. 곳곳마다 신령의 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만약 양심에 거리낀 일을 하게 되면 역시 꺼림칙하게 여겼는데 오늘날 우리가 늘 만나게 되는 가짜 의사나 마음이 검은 장사꾼 등은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민간의 제사 내용은 주로 존경, 감사, 반성과 소원을 표현했다. 말한 김에 한 마디 하자. 소원이라면 또한 착한 일을 많이 하여 복을 받고 소원을 이루길 바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오늘날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재물을 빌고, 벼슬을 빌며, 명예를 비는 ‘제배(祭拜)’와는 구별이 있는 것이다. 중공이 정권을 세운 후 여러 차례의 ‘시련’을 거친 후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선악에 보응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하늘의 이치는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제배(祭拜)’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무신론자로서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믿는 것은 신령이 아니라 현실적인 공명과 이익이다. 문화적 내포가 끊어진 후 형식에 불과한 활동은 본질상 이미 변이된 것으로 사람의 심령을 단속하는 도덕적 효과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1949년 중공은 정권을 세우기도 전에 ‘정월 초하루’를 ‘춘절’로 고치기로 결정했고, 다른 중대한 전통명절(예를 하면 정월대보름, 단오, 추석 등)에 더이상 휴가를 주지 않았으며, 다만 정치적인 기념일에만 휴가와 활동을 거행했다. 예를 들면 ‘5.1’, ‘6.1’, ‘7.1’, ‘10.1’ 등이다. 이렇게 되어 원래 풍부하고 다채로웠던 ‘설 쇠기’가 ‘봄날을 즐겁게 경축’하는 것으로 단순화되었고, 전통적인 명절과 연계된 중화 정통문화의 내포도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중공이 전개한 ‘봉건 미신을 타파’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 운동 가운데 수천 년 동안 민심에 깊이 배인 중화 정통문화는 발붙일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춘절 갈라’는 사악한 당에 대한 찬양으로 관통된 당문화(黨文化)로서 저속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법에 의존하여 관중에게 영합했고, 음미해 볼만한 내포란 전혀 없으니 점점 더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만약 민중들이 ‘설’과 ‘춘절’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대다수 사람들은 그래도 ‘설’을 택할 것이다. 필경, 우리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중화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만사형통하길 바란다.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기대하면서
사촌 형 진암(振岩)으로 부터
2007년 2월 7일

문장발표 : 2007년 2월 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2/8/1485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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