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하얼빈 대법제자 장안(長安)
【명혜망 2006년 12월 22일】 사부님께서는 최근 경문 《오스트레일리아법회에게》에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법공부는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염두(念頭)를 집중해서 배워야 하며, 진정하게 자신이 배워야 한다.” 사실상 법학습을 잘 하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지역 동수들과의 교류에서도 모두들 동감한 부분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법학습을 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학습할 때 어떻게 제한된 시간 내에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여 진정하게 법학습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어렵다. 어떤 때는 비록 법학습 시간이 아주 길고 학습량도 많지만 법에서의 승화와 얻은 효과는 비교적 적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지 못한 것이 진정한 원인이다.
대법 속에서 수련한 이래 나는 매일 제한된 법학습 시간 내에 지금까지 억지로 법학습 양을 추구하지 않았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학습하는 상태와 효과를 중시해왔다. 그리고 법을 학습할 때는 진정하게 주이스(主意識)를 강하게 했고 청성하게 했다. 대법을 통독할 때는 기본적으로 속도를 완만히 했고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마음을 조용히 하고 통독했다. 어떤 때 아주 바쁜 상황에서는 단지 아주 적은 학습시간일지라도(예를 들어 한 시간) 나는 절대 학습량을 억지로 추구하지 않았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는 것을 전제로 최대한도로 조용한 마음으로 법을 학습하는 상태와 효과에 도달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전법륜》을 통독한다고 하면, 이 한 시간의 법학습 시간 내에 비록 반 강의나 혹은 더욱 적게 읽는다 할지라도 나는 역시 또렷하고도 명명백백하게 진정한 자아가 법학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는 중에서 대법의 끝없는 내포는 늘 나를 일깨워주었고 부동한 경지에서 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끊임없이 승화하는 동시에, 또 나로 하여금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는 것의 수승(殊勝)함과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아래에서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존경하는 마음으로 학습해야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있다.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바로 오로지 존경심으로 법학습을 해야지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법학습 상태의 문제가 아니며 실제상 씬씽(心性)상에서 승화하는 것으로 바로 사부님을 존경하고 법을 존경하는 문제이다.
“다른 한 면으로부터 말한다면, 만약 법공부를 할 때 사상이 법에 있지 않는다면 단지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법에 대하여서도 그리 존경하는 것이 못 되는데 그렇다면 법이 나타나고 우러나올 수 있겠는가?”(《미국 플로리다법회에서의 설법》)
우리가 배우는 법은 사부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상이 법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대법에 그리 존경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 대해서도 존경하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동수들은 교류할 때 사부님의 법을 그리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는데 특히 늘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을 사부님의 말씀이라고 삼는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런 표현은 무의식적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부님과 법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나는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한 말이 100% 사부님의 원래 말씀이라고 보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대법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말로 설명해도 무방한데 이렇게 하는 교류방식은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2. 법을 학습하는 과정은 바로 주이스를 수련하는 과정
사부님께서는 《미국 플로리다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 눈이 법을 볼 적에 사상이 법에 있지 않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럼 당신은 헛되게 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럼 누구에게 보여준 것인가? 자신은 공부하지 않았다. 나는 여러분께 반드시 당신 자신이 진정하게 공을 얻으라고 알려 주지 않았는가? 그럼 법공부를 할 때, 사상이 법에 있지 않는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법공부를 시키는 것인가?”
우리 파룬따파 수련은 주이스를 수련하고 주이스가 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단지 연공할 때 뿐만 아니라 법학습을 할 때도 더욱 명명백백하게 자신이 법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학습을 할 때 주이스가 고도로 집중할 수 있는가 여부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사존(師尊)께서는 일찍이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란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이 책을 볼 때 난잡한 생각을 하면, 그 책 속의 무수한 佛·道·神은 당신의 가소롭고도 가련한 사상을 보고 있고, 사상 속의 업력이 가증스럽게 당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법을 학습하는 과정 중에 머릿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한다든가 ‘정신을 판다거나’ 하는 현상은 바로 우리의 각종 집착심과 후천적인 관념과 사상엽력 등의 요소가 대뇌를 교란하고 우리의 주이스를 교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란은 우리 자신의 낡은 우주의 후천적 요소들이 조성한 것이며 이러한 교란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부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강한 주이스로(다시 말해 진정한 자아) 그것들을 배척하고 억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낡은 세력이 ‘승인받지 않고 강제로 주입시킨’ 교란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배척하고 억제하는 과정이 바로 주동적으로 그것들은 제거하는 과정이자 주이스를 제고하는 과정이다.
만약 법학습을 할 때 주이스가 강하지 못하고 강대한 주이스로 우리의 대뇌를 통제할 수 없다면 그런 후천적인 집착과 관념이 틈을 타고 들어와 대뇌를 교란하고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사악이 세간의 악인을 조종하여 우리에게 교란과 박해를 가할 때 우리는 모두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모두 정념으로 사악을 부정하고 사악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한 점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주이스가 견정하고 청성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법학습을 할 때 나타나는 대뇌에 대한 후천 관념과 사상업력의 교란은 실제상 더욱 엄중한 교란이다. 단지 교란 방식과 표현형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수련 중에서 속인의 일체 요소는 모두 우리가 사람을 이탈하여 신으로 수련성취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법학습 할 때 자기의 낡은 우주속의 후천요소들의 교란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외부 교란을 대하듯이 대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주이스가 견정하고 청성하게 하여 세간의 표현 형식을 꿰뚫고 배후의 실질을 똑똑히 보아내는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고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이 역시 우리 자신의 정체(整體)적인 승화와 정체제고의 표현이다.
사존께서는 여러 차례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修在自己,功在師父)”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우리가 법을 학습할 때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있다면 그럼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 하는 이 과정이 바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의 체현임을 깨달았다. 즉 우리가 먼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의 배후에 있는 사부님 법신께서 곧 그 한 층의 법리를 우리에게 점오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공은 사부님에게 달렸다(功在師父)’는 것의 체현이다. 이것은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조용히 하고 학습하는 방면에서 깨달은 나의 이해이다.
3. 법학습 과정 역시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이다
사부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이미 우리에게 대법제자와 자신이 대표하는 우주천체의 대응에 관한 법을 말씀하셨다. 나는 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대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끊임없이 승화됨에 따라, 우리의 그런 후천적 집착과 관념 및 일체 변이되고 대법에 부합되지 않는 사상 역시 끊임없이 대법에 의해 바로 잡히고 제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과정은 또한 우리의 씬씽(心性)이 제고되는 과정이기도 한다. 우리 대법수련은 성명쌍수의 것이라 이때에 씬씽(心性)의 제고에 수반하여 우리 신체의 일부분도 장차 고에너지 물체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우리가 대응하는 천체 중에서 방금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된 그 부분의 신체에 대응된 천체는 곧 대법에 의해 동화되어 새로운 우주로 된다. 또 이 부분 새로운 우주 속의 중생 역시 대법에 동화되어 새로운 우주의 생명이 되었다. 수련과정 중에서 우리는 아직 일부분 집착이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 관계로 이 부분의 집착은 우리 일부분 신체를 교란하여 고에너지물질로 전화할 수 없게 한다. 이를 통해 이 부분 신체와 대응되는 천체와 이 천체속의 중생들도 교란되어 대법에 동화되지 못할 것이다.
낡은 우주의 이치는 대법제자의 수련과 중생구도를 속박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대응하는 천체 중에는 아직 새로운 우주의 생명으로 동화되지 못한 중생들이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낡은 우주의 생명이다. 낡은 우주의 생명은 낡은 우주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 신체와 대응되는 이 부분 낡은 우주의 생명들은 장차 우리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교란 작용을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그들이 동화되거나 구도 받지 못함은 바로 우리의 집착으로 인한 것이다.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당신이 많은 마음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을 교란하게 되며 되돌아 그들 역시 당신을 교란하고 있다.”(《북미순회설법》)
우리가 법을 학습하는 과정 중에서 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끊임없이 승화됨에 따라 우리가 대응하는 천체의 중생들은 끊임없이 동화되어 새로운 우주의 생명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우주의 생명들은 곧 대법의 표준(즉, 새로운 우주의 표준)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도로 우리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도와줄 것이다.
4.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는 수승(殊勝)함을 체험
“우리 이 공법은 법이 사람을 연마하는[法煉人] 공법이다. 법이 사람을 연마(煉)하는 공법은 바로 일부 상태가 모두 공(功) 중에서, 법(法) 중에서 체현되어 나올 것이다. 연공(煉功)과정 중에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부동한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전법륜 제7강》)
내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면서 나는 각기 다른 층차의 법의 내포를 깨달은 동시에 그런 수승하고 아름다운 학습상태를 직접 체험했다. 매번 대법을 통독할 때면 나는 언제나 대법의 에너지 마당 속에 감싸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사유마저도 대법 속에 같이 포용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어떤 때 사부님의 법이 나를 끊임없이 일깨워줌에 따라 나의 사유와 대뇌 용량이 끊임없이 우주의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승화되고 확대되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대법의 끝없는 내포 속에 잠겨있는 수승함과 아름답고 미묘한 감각은 정말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어떤 때는 조용히 통독하는 가운데 사상이 갈수록 조용해짐에 따라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고요히 멈추어 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는데 완전히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정말이지 자신이 완전히 대법의 호한(浩澣)한 지혜와 영원한 위엄(威嚴)속에서 용련(熔煉)되는것 같은 느낌이다. 이때의 감각은 연공에서 입정(入靜)과 입정(入定)에 들어간 상태보다 더욱 수승하고 아름답다. 정말이지 “미묘하기 그지없어 말로 형용키 어려워라(美妙窮盡語難訴)”
(《홍음―법륜세계》)와 같았다. 이렇게 대법에서 내원한 전심전력을 투입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학습하는 상태는 나로 하여금 진일보로 깨달음을 얻게 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할 수 있는 중에서 우주대법의 원용함과 밝은 지혜의 박대(博大)한 내포를 깨달을 수 있었으며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정말이지 일종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영광이며, 우리가 매 한차례 법에서 승화되고 제고되는 것은 모두 끝없는 사부님의 은혜의 체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3가지 일중에서 발정념과 진상도 잘해야 하며 아울러 느슨히 할 수 없다. 이 3가지는 상호 촉진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상적인 수면을 취했음에도 법을 학습할 때 피곤하거나 심지어 멍하여 졸리는 이런 현상은 바로 아주 엄중한 교란이므로 이때 우리는 입장(立掌)하여 발정념으로 졸림과 피곤을 이용해 우리를 교란하는 일체 사악한 요소를 제거해 버려야 한다. 발정념으로 우리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와 외래 교란을 제거한 후에는 법공부 효과와 질도 제고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학습을 잘하면 정념도 점점 강해재고 발정념의 위력 역시 점차 커질 것이다. 그리고 법학습을 잘하면 진상을 알릴 때 우리의 이성과 정념, 지혜가 비로소 강대해질 수 있고 비로소 교란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효과 역시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대로 말한다면 진상을 알릴 때 부딪힌 곤혹과 문제들은 이어진 법학습 중에서 사부님의 법이 모두 점오해주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는 것을 안으로 찾는 것과 병행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어떠한 일에 부딪혔을 때 모두 밖으로 보고 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마음속에 일종의 공평치 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이 모든 생명의 하나의 제일 큰 치명적인 장애이다.”(《싱가포르법회에서의 설법》)
낡은 우주의 일체 생명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거대한 변이요소는 바로 오직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 할 뿐 자신은 개변하지 않는 것이다. 법을 얻기 전에는 우리 역시 낡은 우주의 생명이므로 우리의 갱신된 생명은 바로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 잡고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면서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외부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거나 느슨하거나 상관없이 모두 무조건적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사악이 아무리 거세게 날뛴다한들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없고 누락이 없다면 사악은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이 한 점은 낡은 우주의 이치도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대법에 동화되는 것을 장애하는 그런 집착과 후천관념에 대해 용기 있게 정시(正視)하고 당당히 맞서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모순에 부딪힐 때 어떻게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지 모르거나 혹은 안을 향해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는데 실제상 이 또한 마음을 내려놓고 법을 학습한 것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체 바른 믿음과 정념정행은 모두 대법에서 내원한 것이다.
이번 우주에서는 영원히 다시없을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만고기연을 공동으로 잘 파악하고 사부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잘하자!
이상의 깨달음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대법제자들의 지적하여 바로잡아주고 아울러 원용해주기 한다. 허스.
문장발표: 2006년 12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http://minghui.org/mh/articles/2006/12/22/14521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