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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다 높다”는 마음을 버리다

[명혜망 2006년 12월 27일] 나는 예전의 잠장, 보도원, 지금의 협조인들과 내가 어떻게 남보다 높다는 마음을 버렸는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95년에 법을 얻은 노제자이다. 신체에 병이 없었으나 천목이 열려 다른 공간의 아주 많은 경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대법을 믿고 수련의 문으로 들어 왔다. 대법을 수련한 후부터 아주 정진하였는데 96년에 이미 대법을 외웠고, 세번 베꼈으며, 3일에 한 번씩 《전법륜》을 다 읽을 정도였다. 그리고 홍법하기 위하여 나의 집 주변의 40개의 농촌 마을을 돌아 다녔다. 가부좌를 하면 두 발목이 퉁퉁 부어있어서 퍼런 자주빛이 되었으나 윤택이 났다. 두 다리는 하루 24시간을 시루안에서 찌는 것 같아 너무 아파 밤이면 몇 번이나 깨어났는지 모른다. 화장실에 가면 쭈꾸리고 앉을 수가 없었지만 내가 연공장에 가고 법 공부를 하는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99년 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9번 상경하였고 잡혔다가 풀려 나오면 또 갔다. 사부님께서도 나에게 아주 많은 지혜를 주시어 그 당시 나는 약간의 ‘ 명성’이 있었다. 노교로 판결 받았을 때 솔선 수범하여 파업 ,단식, 수업거부하기, 악경이 ‘학습’을 조직하면 일어나서 그들을 제지하여 강의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들은 물론 동수들도 나에게 모두 탄복 하였다. 동수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나와 의논을 하였다. 예를 들면 들어 간지 얼마 안되어 노교소에서는 경찰 곤봉, 수쇄를 사왔는데 의도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수련생은 나에게 오늘 연공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주 많은 세절을 나는 여기에서 말하지 않겠다. 나는《정법 수련의 길》이란 문장을 썼는데 많은 내용들은 그 안에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위에 있다는 마음이 자라나게 하여 어느 소조에서 법공부를 하거나 혹은 법회를 열던지를 막론하고 만일 내가 말하지 않으면 동수들은 내가 헛걸음을 한 것으로 여겼는데 심지어 나마저도 이런 느낌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 생각해 보니 이런 집착심은 참으로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전면적이고 누락없이 이 마음을 버려야 겠다고 의식하게 되었는가?

우리 지역에는 30여살 되는 한 협조인이 있었는데 누구를 만나든지 ‘당신에겐 무슨 집착심이 있어요’ 법공부를 더 해야 겠어요’, 어떻게 부정……..’하고 제출하군 한다. 동수의 부족점을 제출해 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관건은 심태인데, 늘 자신을 상급으로 여기면서 수련생을 지목하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한 법회에서 그녀는 잡혀 갔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10년 도형을 받았다는 것 같다) 동수들은 모두 말하기를 나도 그녀가 어덴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일하려는 마음이 너무 중하고 지도자처럼 남을 지도하려 하고 언제나 보면 연설하는 식이다. 실지로 동수들은 그녀를 협조인으로만 보고 그녀 역시 수련인으로서 그에게도 아주 많은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자면 협조인으로 되면 다른 사람의 위에 있다는 마음, 과시심, 쟁투심, 명리심 등등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동수의 교훈은 거울처럼 나를 비춰 주었다. 나에게도 부동한 정도로 이런 마음이 존재 하였다. 나는 법공부를 하여 이 마음을 없애 버리기로 결심 하였다. 나는 매 주일마다 법학습팀에 가서 법공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개 팀의 법공부에 참가하였다. 나는 소조에 가서 나 자신을 수련생 가운데 놓고는 공부하고 끝나면 곧장 자리를 떴다. 내 생각에 교류가 필요 할 때면 여러 사람이 자연적으로 말할 것인즉 내가 구태여 지도자처럼 시작하고 끝맺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법회에 참가하면 여러 사람의 것을 많이 듣고 가 해야 할 말을 바로 다른 사람이 했다면 나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나 자신이 법회에서 말하지 않고도 마음이 괴롭지 않고 평형 될수 있는가를 검증해 보고 싶었다. 사부님은 말씀 하셨다”누구도 대법을 도맡을수 없다. 그 불평형된 심리를 버리라! 당신이 마음속에 무슨 불쾌한 일이 있을때면 그것은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우리의 수련생들은 자신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나는 모두 자신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왜냐 하면 오직 나 이홍지만을 제외하고 당신들은 모두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정진요지》)

나는 반복적으로 《책임자 역시 수련인이다》, 《재 인식》, 《경언》. 《불성에는 누락이 없다》, 《청성》, 《영원히 기억 하라》, 《맹격일장》,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 《정론》, 《도법》, 《속인의 마음을 내려 놓고실수를 견지 하자》, 《누구를 위해 존재 하는가》, 《법속에 용해 하자》, 《대법은 이용할 수 없다》, 《견실》, 《마성을 숙청하자》등등 경문들을 읽었다. 아마 나의 집착심이 너무도 많고, 사람 마음이 너무도 중했던 때문인지 이상의 경문들을 보니 문장마다 나에게 대하여 모두 제고가 있었으며, 모두가 나의 부족점을 짚어낸듯 싶었다. 이전에도 늘 보았는데 어찌하여 보지 못했을까? 내가 생각 하건대 이전에는 심성이 제고되지 못하였으므로 보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사부님과 정신들은 내가 진정으로 제고하려는 것을 보고 비로서 나에게 점화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보게 한 것이다.

《전법륜》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많은 곳에서 나를 놓고 말한 것이다. 나는 법공부를 한 주일에 한 벌을 읽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전법륜》을 통독하고 , 토요일, 일요일이면 후기 설법을 주로 보는데 《정진요지》, 《홍음》등등을 포함 하여서이다. 이전에도 이렇게 공부 했었는데 무엇 때문에 최근 1년동안에 읽은 것이 이렇게 많은 내포가 있는가?나는 주요하게 심성상에 많은 힘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는 것은 위덕을 세우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제고하지 않고 무조건 안을 향해 찾지 않는다면 나를 “정법시기 대법제자”라 부를 자격이 없다. 어떤 때 정진하지 못하면 곧 쉽사리 “세가지 일을 잘 했다”와 “세가지 일을 하였다”의 개념을 뒤섞게 된다. 사람을 구하는데는 마음을 쓰는 대소에 구별이 있다. 법공부에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했는가, 진정으로 자신이 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발정념에는 완전히 조용해져 하늘을 떠받든 신불과도 같이 강대한 정념을 발할수 있는가가 있다. 어떤 수련생은 한달내에 거의 천에 달하는 사람을 “3퇴”시켰는데. 나는 지금까지 2년이 다 되었는데도 겨우 천명에 다가 서고 있다. 허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나는 법공부를 많이 하여 법에서 제고 하련다.

정법은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다. 나는 나와 같은 집착이 있는 동수들께서 법공부를 많이 하여 하루 속히 집착을 버리기 바란다, ”진선인”에 동화 되는 외에 그 어떤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과 집착이든 모두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부님은 말씀 하셨다. “수련 가운데서 버려야 할 매 하나의 마음은 모두 하나의 장벽으로서 거기에 가로 놓여 당신의 수련의 길을 가로 막고 있다”(《정진요지》)

사부님은 《책임자 역시 수련인이다》와 《청성》 두 편 경문에서 모두 말씀 하셨다. 우리 협조인, 책임자는 대법중의 정화들이다.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집착을 버림에도 응당 더욱 빠르고 더욱 사정이 없어야 하며, 집착심에 그 어떤 발붙일 자리도 주지 말아야 하거니와 사악한 생명에게 그 어떤 구실을 잡혀 구멍을 뚫고 들어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 집착이 있다면 가급적 법공부를 통하여 제고되어 올라 와야 한다, 물론 그것이 박해할까 두려워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법제자로서 응당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며 일찍이 원만되어 사부님을 따라 진정으로 훌륭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문장발표 : 2006년12월27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12/27/1454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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