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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우리의 책임을 짊어지자>>를 읽고서

[명혜망 2006년 12월 15일] 이전에 동수들이 정념, 고비를 넘을 때면 사부님을 청한다는 말을 늘 들어 왔으나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어떤 때는 이 역시 어느 층차에서의 동수의 정념이라고 여겼다.

명혜주간 246기에 실린 《일어나 우리의 책임을 짊어지자》란 문장을 읽은 후부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한 수련생이 꿈에서 사부님께서 중생, 제자들을 대신하여 업력을 감당하신 후, 신체가 손상되셨고 박해를 심하게 받으신 것을 보았다. 내가 생각하건대,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관건적인 시각에 사부님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며,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응당 법을 더욱 잘 배우고, 오성을 더욱 좀 높이며, 정념을 더욱 좀 강하게 해야 하는데, 자신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으며, 마난 중에서 어떠한 책임도 감당 할 수 없는 ‘미성년인’의 수준에 그냥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사부님은 정법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정법 가운데서 사부님에게 구도된 생명 중 제일 낮은 층차에 놓인 생명으로서, 다만 사부님이 정법 하시는 이 시각에 법을 얻어 수련하게 되었고 정법과 함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아마 이 특수성으로 하여 사부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역사 과정에 빚은 많고 많은, 대부분은 개인으로는 이미 갚을래야 갚을 방법이 없는 업력을 감당하셨을 것이다. 이러하다 해도 아주 적은 부분의 남은 업력인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른바 고비, 난을 넘으려 하지 않으며,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업력이 조성한 마난에 직면하면 여전히 사부님을 부르며, 사부님더러 해결하시게 한다.

그런데 우주 중에는 법이 있어 제한을 받는다. 어느 생명이 무엇을 했으면 모두 반드시 후과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 빚을 당신은 갚지 않았는데도 누가 당신에게 해결해 주었다면 누가 감당해야 한다. 아울러 실질적인 감당을 해야 하며 갚아줘야 한다. 그렇다면 고비, 난 가운데서 사부님을 부르고, 사부님께 해결을 청한다면, 혹은 마음속으로 ‘참으로 영험하다’고 기뻐 할 때, 우리는 생각해 보았는가. 그 ‘영험’한 배후에는 사부님이 우리를 위해 감당하셨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낡은 우주 생명의 사상의 진실한 체현 ㅡㅡ위사 위아이다. 그런데 우리는 낡은 우주로부터 걸어 나오려 하며, 무사 무아하며, 완전히 남을 배려 해 주는 신, 우주의 생명으로 성취되려 한다. 물론 수련 가운데 이른바 관을 넘고 제고한다는 것은 우리 개인이 감당한 고만한 고통 외에(우리 자신의 업력과 상대적임을 말함)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우 복잡한 그 일체 역사중의 은혜와 원한을 평형시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전제는 반드시 우리 관념의 승화와 개변이다. 이 역시 바로 수련인과 정상인의 근본적 구별이며, 사부님과 중생이 우리를 승인하는 관건이다.

720 이후 법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매번 시끄러움과 고비를 만날 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사부님께 차마 청하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어떤 때 사부님께서 법리상에서 가리켜 주기를 바랄 뿐이며, 그런 다음에는 대법 가운데서 신념을 확고히 하고 바로 이렇게 하는 중에 모르는 사이에 마난이 없어졌다. 실제적으로는 사부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아마 ‘구함이 없음에 저절로 얻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흔히 법공부에 정진하지 않을 때 마난 가운데서 하늘땅을 원망하고 심지어 사부님이 관할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하여 마난을 더 돌출하게 하고 닫혀서 수련한다면 더욱 넘어가기 어렵다. 실제로 이때의 표현은 이미 집착심의 표현이다. 수련은 바로 집착심을 버리는 것인데 사부님이 당신의 집착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마난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하늘에서 직접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오히려 더욱 좋지 않겠는가? 알아야 할 것은, 제도받는 사람은 간고한 수련 속에서 비로소 예전에 나쁜 짓을 저질러 조성된 죄업(罪業)을 깨끗이 갚을 수 있으며, 사람의 집착과 좋지 못한 일체를 버릴 수 있으며, 동시에 행위와 사상을 바른 데로 되돌아오게끔 하여야만 비로소 제도될 수 있는 것이다”(신의 서약은 실행 중에 있다). 우리는 응당 법리상에서 수련인의 심태로 마난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며, 정정당당하게 마난을 대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업력을 모두 사부님께서 감당 하셔야만 고비를 넘을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 수련의 제고가 어디에서 체현될 수 있겠는가?

문장발표 : 2006년 12월 15일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6/12/15/1446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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