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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서 있다’에 대한 약간의 인식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1월 29일] 며칠 전, ‘610’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중 사악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엄격하게 대법과 당신을 구별하시오. 대법은 대법이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이에 대해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봤더니, 뜻밖에 자신이 10년 간 법공부하면서 똑똑히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곧 무엇을 보고 ‘법에 서 있다’라고 하는 것인가 이었다.

나 개인이 깨닫기를, 대법을 한 사람으로 놓고 비유할 때 (합당하지 않을 수 있음) 대법은 곧 한 사람의 신체 전부이고, 우리 매 대법제자는 곧 이 신체 중의 하나의 분자이다. 대법제자가 세 가지 일을 할 때, 만약 확실하게 자신을 대법 중의 하나의 분자로 본다면, 쳐서 내보내는 공능은 곧 대법이란 신체의 두 주먹으로 쳐 내보낸 것이다. 부동한 층차의 대법제자는 곧 부동한 층차의 대법 주먹으로 쳐서 내보낸 위력인바, 이 역시 곧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님께 달렸다.’이다. 왜냐하면 이 대법은 가장 바르고 만능인 것으로 법력은 끝이 없는 것인바, 일체 문제는 모두 자연히 순리적으로 해결된다.

예를 들어, 박해를 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진정 자신을 대법 신체 중의 하나의 분자로 본다면 그 사악의 박해는 그 누구든 모두 이 대법 신체를 박해하는 것인 즉, 대법을 박해하는 것이다. 이 우주 중의 그 어느 생명이 감히 우주를 구성한 일체 대법을 박해하고 고험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생명이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한 수련생이 말한 한마디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감히 법을 박해한단 말인가?” 사악은 곧 그를 놓아주었다. 생각해보라. 이 수련생은 자신을 대법 중에 용해시키고 법에 서 있지 않았는가? 불법(佛法)의 끝없음이 곧 그 동수의 몸에서 체현되어 나타났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서 나는 비로소 이전에 자신이 진상을 알릴 때 늘 자신을 앞에 세웠는바 엄중하게 자아를 실증했음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나는 맞고 억눌리는 속에서 진실한 말을 하겠다. 나는 고위 기관을 찾아 가서 진실한 말을 하겠다. 출근하지 않을지언정 진실한 말을 하겠다. 그리하여 나는 중생을 구도하겠다.’ 등등이다. 때문에 대부분 곧 파룬궁을 단속함에 대해 분개를 하며 불평하는 등 이런 상황에 빠져 들어가 마치 세인들이 공정함을 줄 것처럼 그들에게 구하였다. 이 과정 중 늘 조급해하고 늘 다른 사람들과 쟁론하며 발정념마저 잊고는 했다. 자신을 실증하고 대법을 실증하지 않으니 자연히 법의 위력도 없었고 효과 역시 당연히 썩 좋지 않았다.

지금 진상을 알릴 때면 먼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대법은 사람들이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들한테 그 어떤 일을 하든지 우선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이번에 비로소 당신에게 파룬궁을 박해한 진상을 알려드립니다.” 이 과정 중에서 심태는 매우 많이 평온해졌다. 이렇게 함이 법에 서서 법을 실증함을 첫 자리에 놓는 것이 아닌가?

개인이 깨달은 점이다.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문장완성:2006년 11월 27일
문장발표:2006년 11월 29일
문장갱신:2006년 11월 28일 19:25:49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1/29/14341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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