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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대법 과 사부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동수들’과의 교류

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1월 18일】 99년 7월 20일 사악의 박해 초기에 아주 많은 수련생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법은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사부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법을 도대체 배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였다. 우리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확고하게 걸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후 법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가운데 법리에 대해 점점 더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되었다. 정법제자의 거대한 사명에 대해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각자 반본귀진(返本歸眞)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자신의 수련의 길을 걸어 나올 수 있었으며, 대법제자의 영원하고도 무량한 위덕을 쌓아 우리의 세계를 원만 시키고 있다. 이 얼마나 수승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대법제자가 이 일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성하셨고 우리에게 위덕을 세울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호탕(浩蕩)한 불은(佛恩)은 제자들로서는 영원히 보답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주 정법이 막바지에 다다른 오늘, 대법제자들이 곧 미래의 휘황을 막 펼쳐 보이려 하는 때, 우리 일부 동수들 심지어 일부 노(老)수련생들마저 때때로 법에 대해 동요하고 사부님에 대해 의심하면서 정진실수(精進實修) 하지 못하고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매번 정법 가운데서 나타나는 일부 새로운 형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자기도 모르게 사람의 마음으로 법을 대하고 사람의 이치로 사부님을 가늠하거나 심지어 사부님께 불경한 말을 한다. 비록 그들이 한 말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도 말이다. 매번 이런 일을 보거나 들을 때면 내 마음은 아주 괴롭다. 그것은 사람이 느끼는 그런 아픔이 아니며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도하시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이며, 너무도 깊이 미혹된 동수에 대한 초조와 슬픔인 것이다.

동문(同門)제자로서 수련생이 어느 곳에 틀린 곳이 있다면 마땅히 제때에 일깨워 줘야 하고 그의 마음속 매듭을 풀어줘야 한다. 이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나는 이 문장을 통해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믿음에 동요하고 있는 동수들과 솔직한 교류를 나눔으로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잘 걸어가고자 한다.

내가 접촉하거나 들은데 의하면 무릇 이런 동수들의 대다수는 법리상에서 똑똑하지 못한데다가 사람의 집착심이 한데 겹쳐 정법 중에서 나타난 일부 문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또 제때에 법공부을 통해 마음속 매듭을 풀지 못했고, 명백하지 못한 문제들이 점점 더 많아져 후천적 관념의 지배하에 수련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사부님과 법에 대한 믿음을 동요한 것이다. 아래에 이 부류의 동수들이 동요하게 된 몇 가지 주요한 문제점들에 대해 교류를 진행하고자 하는데 동수들의 마음속 매듭이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1) 대법서적의 개자(改字)에 대한 몰이해

대법서적의 일부 글자들은 이미 여러 번 고쳤다. 이에 대해 일부 수련생들 사이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나타났다. “불법(佛法)이라고 하면서 왜 이리저리 고치는가? 어째서 늘 변하는가? 불가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법이라고 했으면 마땅히 변하거나 움직이지도 말아야 하는데 어째서 또 변하는가?” 때문에 사부님에 대해 의심과 이해하지 못함 생겼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이 있는 수련생들은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도리가 있다고 느낀다.

동수여, 나는 한마디 묻고자 한다. “당신이 말하는 도리는 사람의 이치가 아닌가? 낡은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되돌아와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을 보기로 하자. 사부님의 법에서부터 우리는 알았다. 대법제자들은 모두 아주 높은 층차에서 왔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왜 왔는가? 낡은 우주는 이미 말겁이 닥쳐왔으며, 이미 성주괴멸(成住壞滅)에서 멸(滅)의 단계에 다가 왔으며, 뭇신들도 모두 어떻게 자신을 구할 것인지 선택하고자 한다. 매우 높은 천체의 왕(王), 주(主)인 우리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시어 법을 바로 잡아 전반대궁을 구도하려고 하심을 알았다. 그런데 낡은 세력 역시 낡은 우주의 생명일 뿐만 아니라 매 층 천체중에서 아주 능력 있는 생명들로서 그것들 자신은 아주 세밀한 배치를 했고 사부님의 정법이란 기회를 빌려 그것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생명을 도태시키고 이른바 우주를 정화하여 그 가운데서 자신의 일체를 남겨 위사(爲私)한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정법을 통해 가급적 우주 대궁의 모든 중생을 구원하려고 하신다. 이것은 낡은 세력의 생각 및 배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세력의 일체 변이된 배치는 교란으로 되었고, 사부님께서 법을 바로잡으시는 중에 거대한 난으로 된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낡은 세력의 층층 배치는 사람 표면 공간에 와서는 사람의 문화, 사상, 행위에 모두 심각한 변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체현된다. 그렇다면 바로 대법서적의 글자를 고치는 것을 놓고 말하더라도 나의 개인적인 깨달음은 , 낡은 세력은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시초에 이미 일체에 대해 주도면밀한 배치와 변경을 했고 그 중에는 세간에서 문자의 사용 및 내포가 포함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미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 아니었다. 물론 대법이 전해질 때 사부님께서 만약 낡은 세력의 배치를 이용하지 않으시고 직접 새로운 우주의 문자 내포로 설법하시고 책을 찍으셨다면 온 머리에 낡은 우주의 이치로 가득 찬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방법이 없게 된다. 낡은 관념의 제약은 우리들로 하여금 대법 속으로 걸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대법의 곁을 스쳐지나가게 할 것인즉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도하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일체는 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법노정이 일정한 시기에 이르면 대법 서적 속에서 내포가 변이된 일부 문자들을 수정해야 함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개자(改字) 역시 사부님께서 정법하시는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개자하는 일을 대법제자들더러 하라고 하시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하라고 하신 일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며, 모두 우리가 잘되라고 하는 일이며, 모두 우리의 수련원만과 관계되는 일이다.”라고. 그렇다면, 개자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정말로 사부님과 법을 그렇게 확고하게 믿었는가?

(2)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박해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몰이해

사부님께서는 법속에서 이번 박해를 승인하지 않으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고 대법제자들도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또 이해하지 못하는 동수들이 있다. 특히 감옥 안에 감금된 동수들이 잔혹한 고문을 받는 것을 보고는 더욱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사부님께서는 박해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잔혹한 박해가 발생하게 하셨는가?” 때문에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동요되었다. 나는 이것은 바로 수련생이 법 공부를 체계적으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사부님은 확실히 이번 박해를 승인하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다면 정법 가운데서 낡은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거니와 또 대법제자들더러 발정념을 하여 사악을 제거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낡은 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곧 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되는가? 그것을 제거해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데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미래 각 층 천체의 법왕(法王)으로서 수련 가운데서 반드시 신우주(新宇宙)의 요구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낡은 세력은 질투심으로 인해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보면서 우리가 조금만 잘하지 못해도 그것들은 틈을 뚫고 들어 와 고험을 한다는 구실로 시기를 노려 우리를 교란하고 박해하며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박해가 무엇 때문에 발생했고, 무엇 때문에 어떤 수련생은 그렇게 엄중한 박해를 받는가에 대해서는 동수들이 《북미순회설법》, 《2003년 정월대보름날 설법》 및 나중에 나온 일부 법회에서의 설법을 읽어볼 것을 건의 한다. 사부님께서는 진실한 원인을 이미 아주 투철하게 말씀하셨고 사람의 표면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동수들이 이 방면의 설법을 많이 본다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오직 우리가 법공부를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법리에 대한 인식이 이성적인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무엇이나 모두 명백해질 것이다.

(3)시간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이번 박해 가운데 안일을 구하는 사람 마음으로 인해 아주 많은 대법제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바로 시간에 대해 집착하면서 언제쯤이면 수련이 끝날 수 있는가? 3년, 5년…… 그리하여 사부님의 설법 가운데서 답안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사부님께서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 하신 것과 같다.
“당신들이 당초에 이번 박해 속에서 모두 하루가 일년과도 같이 느껴졌고, 지금 이 시간을 포함하여 여전히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때에 결속될까? 이 박해가 어느 때면 맨 끝에 이를 것인가? 때문에 어떤 사람은 생각하고 있는데 사부가 시(詩)에서 봄날이 곧 올 것이라고 썼으니 (뭇 웃음) 생각하기를 아, 봄이면 곧 결속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전에 시에서 또 가을을 썼는데 (뭇 웃음) 그러니 어떤 수련생은 말하기를 반드시 가을에 결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가을도 지나갔는데 결속되지 않았고, 마치 일종의 실망감이 있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것은 한 속인의 마음으로 이 일체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몇 차례 반복이 있게 되자 일부 동수들은 곧 동요하기 시작했고 “대법수련이 도대체 결속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사람 마음의 부추김 하에 사부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대의 예언에 대법의 결속 시간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그런 예언들에 따른다면 박해는 일찍이 끝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결속되지 않는가? 내가 깨달은 것은 첫째, 그런 예언가들이 본 것은 낡은 세력이 배치한 상황으로 진정한 정법 중의 상황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 둘째, 사부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구도하려 하신다. 그러나 대법제자들이 아직도 아주 많은 사람 마음을 버리지 않아 정법 표준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결속 시간을 연장하심으로써 대법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보다 많은 중생들을 구도하게 하셨다. 정법이 결속되기만 하면 일체가 결정해질 것이며, 그때에 가서는 잘해 보려고 해도 늦은 것이다. 또 일찍이 박해 가운데 대법에 대해 미안한 일을 했지만 아직까지 제때에 보완하지 못한 수련생들은 만약 정법이 신속히 결속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본문에서 제기한 것처럼 사부님을 확고히 믿지 못하는 이런 수련생들이 만약 제때에 인식을 바르게 돌려세우지 않고 제고해 올라오지 못하면서 수련이 최후로 결속될 때까지도 여전히 법에 대해 동요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는가?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사부님과 법에대한 믿음마저도 해낼 수 없다면 또 어찌 원만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정법이 결속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로소 사부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신 것이 아닌가? 일찍이 한 동수의 가족이 “시간을 길게 끌수록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금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을 것이다.

(4)법속에 모순이 있다고 느낀다
일부 동수들은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곳에 부딪치면 마치 속인이 학문을 연구하듯이 문제를 파고든다. 결국 파고들수록 더욱 알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법에 모순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이 때문에 몰이해가 생긴다. 이에 대해 나는 나의 소감을 말해 보고자 한다.

법을 얻은 초기부터 나는 비교적 법공부를 중시했으며 사부님의 법을 한 편 한 편씩 읽어나갔다. 가끔은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속인의 이치로 법을 가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문제를 파고들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공부해 나갔다. 법공부를 점점 더 많이 했을 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던 곳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설법은 다 원용한 것으로 전부 일체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했다. 미묘한 불법에 잠기고 보면 마음속의 편안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끝없는 불법가운데서 내가 깨우친 자그마한 감수에 불과하지만 이 법은 참으로 너무나 큰 것이다.

끝맺는 말
동수들이여. 나는 수련인으로서 어떠한 일에 부딪히든지 마땅히 무조건적으로 안을 향해 찾아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사부님과 법을 굳게 믿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사상이 나타났을 때 즉각 안을 향해 찾을 것인가 아니면 밖을 향해 찾을 것인가? 나는 어떤 수련생이 수개표를 보고 한 첫마디 말이 곧 “왜 또 글자를 고칠까? 고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속에는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숨어 있고 자기의 시간을 지체시킨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자신이 법리상에서 개자에 대한 의의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금후의 법공부 가운데 점차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으로 개자를 함부로 평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외에 우리가 시간이 결속되지 않은데 대한 집착으로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 자신의 그 속인의 이익에 대한 마음이 건드려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는가? 만약 평화적인 시기라면 우리가 이렇게 집착할 수 있겠는가? 박해 가운데서 사람 중의 이익을 잃을까 두렵고,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인해 생긴 동요는 아닌가? 대법에서 좋은 것만 얻으려고 하고 대가를 치르기는 싫어서가 아닌가? 한 손에는 부처를 붙잡고 놓지 않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면 이런 생명이 원만할 수 있겠는가? 신우주의 이치로 가늠해 보아도 모두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련하는 사람은 세간의 득실을 따지지 않으며, 정법 중에서 우리가 얼마나 대가를 치렀던지 모두 자신을 원만시키는 것이다. 미래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동수들이여, 더 이상은 후천적 관념에 의해 자신을 지배당하지 말라. 생각해 보라, 속인이라 할지라도 지식을 얻으려면 먼저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만약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지식을 듣고는 “맞을까?”하는 생각을 갖고 선생님께서 다시 새로운 지식을 하나씩 강의하실 때마다 우리가 또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이것은 대법 수련인데 또 어찌 이렇듯 확고할 수 없겠는가?

사실 의심하는 그 사상은 당신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변이된 관념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떤 수련생들 역시 동요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일체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힌 다음 법공부를 하여 이성적인 인식에로 승화되는 것이지 감성적인 인식에 머물러 대법이 신체에 대해, 사람의 도덕을 제고시키는데 대해 좋은 점이 있다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 바로 사부님께서 《경언(警言)》에서 제출 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상의 문제가 있는 수련생들이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발정념을 많이 하여 자신을 청리하면서 최후의 길을 잘 걸어 자신에게 유감을 남기지 말 것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문장발표 : 2006년 11월 1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6/11/18/14261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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