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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 ‘인(忍)’에 대한 체득

글/산둥(山東)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1월 17일】 명혜망에 적극적으로 투고해야 하며 자신의 수련경험과 체득을 써내야 한다는 동수들의 말과 명혜망 문장을 늘 보고 들으면서도 항상 자신은 별로 할 말이 없고 무슨 ‘큰’ 일을 한 것도 없다고 여겨 미적거리면서 실제 행동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제3회 대륙제자 서면교류회에 발표된 동수들의 문장에서 쓰지 않으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많이 투고해야 한다는 것을 보니 분명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에 자신의 체득을 써내기로 결정했다.

집사람은 속인이며 비교적 트집을 잘 잡고 성격이 급한 편이다.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인데 설사 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과정이 부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걸레질을 할 때도 반드시 어느 곳을 먼저 한 후 다른 곳을 해야지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아침을 데워주면 아주 조금만 먹고 데워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도와주면 이것이 틀리고 저것이 틀렸다고 타박하고, 그렇다고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에 대해 무관심하다며 또 화를 낸다.

어느 날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늦어졌다. 전에 나는 늘 선의(善意)적으로 아내에게 조금만 서두르라고 일깨워주었지만 여전히 몇 차례나 스쿨버스를 타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내가 잔소리를 한다면서 싫어했다. 이번에도 유치원에 지각을 했다. 돌아온 후 그녀는 나를 원망하며 “차가 가는 것을 보고도 서두르지 않아요?” 나도 화가 났다. ‘아침에 내가 여러 번 서두르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제 와서 나를 탓하다니.’ 우리는 둘 다 화가 났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인은 화를 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 그리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며 아내 역시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 말을 해도 여전히 듣지 않았고 결국에는 나를 원망했다. 또 유사한 다른 문제들이 있어서 집에서 우리 부부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말만 꺼내면 이해하지 못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이번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서둘렀다면 설사 차가 정차하지는 않았더라도 아내도 내가 노력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또 그리 심하게 나를 탓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근본적인 문제는 그녀가 꾸물거린 것으로 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내가 서두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서두르지 않으면 실로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법을 생각해보니 인(忍)은 부동심(不動心)이다. 그렇다면 이 요구에 따른다면 설사 아내가 나의 호의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마땅히 계속해서 그녀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권해도 잔소리를 한다면서 싫어하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장기간 이 문제를 생각하다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작법은 이러했다. 내가 당신에게 좋게 대해도 당신이 듣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리 좋게 대해도 여전히 듣지 않는다면 그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사부님께서 중생을 구도하실 때 사부님을 욕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는 그래도 구도하셨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 나는 몇 번 노력해본 후 곧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사람과 신(神)의 구분이 아닌가? 사람도 선(善)을 할 수 있지만 여러 번 타격을 받은 후에는 곧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신은 도리어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서이다. 바로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되자 나는 길이 열림을 느꼈다. 아내의 좋지 않은 태도를 상관하지 말자. 근본적으로 말해서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자신에게 잘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녀의 성격이 아무리 나쁠지라도 역시 ‘선(善)’에 의해 포용되고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나는 청소 및 위생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옷을 개지도 않았다. 게으른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의 뜻에 부합하지 못했기에 노력을 하고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녀의 심태가 좋을 때 대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했는데 그녀는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늘 주동적으로 집안일을 하며 아내 역시 아주 기뻐하면서 트집 잡는 것을 ‘잊어버렸다.’ 내 인식의 변화에 따라 아내 역시 너그럽게 변했는데 이 모두는 법의 힘이 아니겠는가!

이 과정을 돌이켜보니 ‘깨달음’은 정말 아주 어렵다. 어떤 때는 당신이 문제를 의식할 수는 있지만 해결방법을 깨닫지 못한다. 오로지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에서 깨달아야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점화해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사한 문제를 지닌 동수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곤란에 직면하여 분풀이를 하지 말고 법에서 많이 깨달으며 집착을 찾아 씬씽(心性)을 제고하면 반드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동수들과 함께 용기를 북돋고자 한다.

문장발표 : 2006년 11월 1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11/17/14259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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