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흑룡강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0월 29일] 2005년 여름, 나는 본 지방의 모 협조인이 자아의 편향으로 집착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지적하였다. 동수의 문제를 발견하고 면전에서 선의적으로 지적하는건 틀리지 않지만 나는 그중에서 안으로 자기를 찾는 것을 홀시하였다. 기실 내가 동수에게 자아에 집착하는 문제를 지적할 때 나 자신도 똑같은 문제가 존재하였다.
당시 본 지방의 일부 동수분들이 내가 법리에 대해 깨달음이 높다고 모두 내가 법회에서 발언하는걸 듣기 좋아하고 어떤 수련생은 심성관을 넘지 못할 때 나하고 교류하길 원한다. 본 지방의 수련생들이 법을 증실하는 중요한 활동도 나의 의견이 왕왕 협조인에게 반영되기도 하였다. 이 일로 법리상에서 인식을 제고하지 않고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을 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어떠어떠하게 할 수 있고 동수중에 말이 무게가 있고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소한 행동과 행동이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대법과 동수들 위에 놓은 것을 이제야 인식하게 되었다.
가령 자기하고 동수들의 교류 혹은 법회에서의 발언은 동수들에게 일정한 정도에서 적극적인 영향을 일으킨다 해도 혹은 자기의 건의가 법을 증실하는 중 좋은 효과를 일으킨다 해도 그것의 내력은 모두 대법의 위력에서 온 것이다. 혹은 사부님이 나의 입을 통하여 동수들을 점화한 것이다. 나는 법중에서 하나의 작디작은 입자에 불과할 뿐이고 사부님과 대법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당시 동수의 집착만 보고 돌이켜 나 자신을 대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나 자신에 집착하는 마음이 나날이 팽창하기만 하였다. 법을 증실하는 중에 자신을 증실하여 끝내는 사악에게 빈틈을 타게 하여 간수소에 붙잡혀 들어갔다. (며칠 후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호하에 정념으로 뛰쳐나왔다.) 만일 그때 동수의 집착을 본 후에 제때에 자기를 찾고 자기를 수련하였더라면 자신을 집착하는 마음을 일찍이 버렸다면 적어도 이때까지 팽창하지 않았을것이고 자신도 신의 길에서 심하게 곤두박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훈은 너무나 심각하다!
사부님께서 99년 발표한 경문에 《시간과의 대화》중 이런 한단락 설법이 있다.
신: 이 문제는 이미 아주 엄중하다. 그들이 상대방을 어떠어떠 하다고 말하기 보다 돌이켜 본인을 보았으면 좋겠다.
사부님: 마땅이 그들을 청성하게 해야 한다. 그들의 환경이 하나의 진정하게 수련하는 환경으로 되어 진정한 신이 되어야 한다.
나는 깨달았다 : 대법이 수련하는 환경은 매 사람마다 안으로 수련하는 환경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더러 보게 하는가? 그래 우연이란 말인가? 가능하게 사부님이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갖고
당신을 경고하여 당신더러 자신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대법제자는 상대방의 문제를 보았을 때 선의적으로 상대방을 지적하는 외에 꼭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이래야만 대법수련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자신이 정체중에 진정으로 승화할수 있다.
그러나 정법수련 중에 얼마나 되는 수련생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본지방의 모 수련생은 늘 주위의 남녀동수 관계가 비정상이고 일반 속인의 정을 초월했다 한다. 기실 이때 응당 열심히 본인을 찾아야 한다. 나도 동수에게 정이 생긴게 아닌가? 어떤 동수들은 늘 다른 동수들의 게으름을 본다. 그럼 응당 본인을 찾아봐야 한다. 법공부하고 연공하는데 정진하지 못 하는 곳이 있는 않는지를
희망하건데 동수들이 모두 나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두고 다른 동수들의 문제를 보면 먼저 자신을 찾아야 하고 ( 더욱 선의적으로 그때 그것을 지적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수련의 환경이 하나의 진정한 수련의 환경으로 될 것이다.
문장구분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10/29/1411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