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다롄(大連)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0월 16일】
최근 한 시기 우리 지역 동수들이 끊임없이 박해 받는 정황이 나타났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교류할 때 동수들은 대부분 낡은 세력에 대한 우리의 부정(否定)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지적했으며 하나의 보편적인 인식은 설사 우리에게 누락이 있더라도 사악의 박해를 허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법에 대한 이런 깨달음은 옳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종종 모두 부지불식간에 이를 우리가 안을 향해 찾지 않는 구실로 삼는데 마치 우리가 정념으로 부정하기만 하면 곧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을 한번 학습해보았다. 내가 인식하기에 우리의 원만은 자신의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박해에 반대하는 것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수련의 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수반하여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길이 존재하는데 바로 낡은 세력이 배치한 대법과 대법제자를 파괴적으로 고험하는 길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닦은 것이 어떻든지 막론하고 이 길을 시종일관 정념으로 부정해야 한다.
사실, 일부 박해는 확실히 우리의 정념을 통해 부정되었거나 또는 사부님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자신을 수련하는 이 길에서 제고해 올라온 것과는 같지 않다. 사악은 왜 우리를 박해할 수 있는가? 박해가 나타난 데에는 반드시 그 이면에 우리 개인의 집착과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부족을 찾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에 부딪히든지 상관없이 그곳에는 모두 씬씽의 제고가 관통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원만할 수 없고 우리가 한 일체는 모두 정법수련이라고 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호법신(護法神)들도 사악을 제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대법제자로 불릴 수 없다.
어떤 동수들은 여러 차례 위험이 나타났지만 매번 해결된 후에는 도리어 제때에 안을 향해 찾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이 정념으로 부정한 것만을 강조하는데 그럼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이번에 부정했는데 왜 다음번에 또 올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 집착을 움직이지 못했고 그것이 시종 사악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이 박해를 받는 것이 엄중할 때 “엄마야, 엄마야”라고 외치는 사례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할 때는 사부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시다는 것을 설명한다.
지금 우리가 박해받을 때 비록 애초에 “엄마야”라고 외친 그 수련생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각기 다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이 사악의 틈을 타게 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해결해주신 매 차례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낡은 세력이 박해를 가중할 때까지 줄곧 집착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하여 사부님께서도 어쩔 수 없게 한 것은 아닌가? 그러고도 우리가 사부님더러 낡은 우주의 모든 신들을 다 훼멸해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때문에 이러한 번거로움에 부딪히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이 방면에서부터 많이 찾고 바르게 하도록 함으로써 낡은 세력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2003년 정월대보름날 설법》)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왜 우리가 어떤 때 반(反)박해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왜 수련생을 구원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했는지 생각해보게 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가 구원에 성공할 때 자신의 부족을 잊고 단지 성공한 경험만을 총괄하고 박해를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수련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을 찾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단지 낡은 세력이 배치한 이 길을 부정했을 뿐인데 이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씬씽을 수련하는 이 길에서 전진한 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집착이 성공에 의해 덮어 감춰졌기 때문에 매우 많은 경우 사악은 죽어라 그곳에서 가로막고 우리의 집착을 구실로 일이 성공하지 못하게 한다. 다른 한 각도에서 말한다면 만약 우리가 단지 반(反)박해에 성공하고 자신을 찾는 것을 잊는 길을 걸어간다면 그럼 낡은 세력에 대한 우리의 부정도 철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 때문에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늘 씬씽을 수련함’을 잊는다면 이는 여전히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대법의 매 한 가지 일을 할 때 성공에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모두 조용히 자신에게 드러난 부족함을 찾아보고 곧바로 성공 경험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에 이렇게 하는 동수야말로 비로소 진정으로 사람들이 숙연하게 존경하게 되고 사악이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낡은 세력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닦고자 한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법학습을 많이 하는 것이다. 다롄에서 최근에 나타난 박해사례들을 둘러보면 우리 동수들에게는 박해받거나 구원에 바쁘거나 예전 일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안건이 발생했고 심지어 구원을 조직한 동수마저 구원받을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것이 법에 있었는가 있지 않았는가? 법학습과 연공은 매일 모두 다그쳐야만 하지만 종종 모두들 다른 일을 다 끝낸 다음으로 미루어놓거나 혹은 일이 거의 바쁘지 않을 때로 미루는데 때문에 법학습과 연공을 보증하는 일은 사실상 이미 생각만 있을 뿐 이룰 수 없는 일로 변질되어 버렸다.
사실 이런 종류의 작법은 이미 법에서 벗어난 것으로 비록 모두 적지 않은 일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효과가 적고 한 가지 박해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늘 일을 하려는 마음이 존재했다. 다음에 두 번째 박해사건이 나타나면 우리는 안전에 주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세 번째 박해 사건이 발생하면 늘 정체(整體)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며 근본원인은 바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법학습을 잘 하지 못했고 법의 요구에 따라 수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박해를 겨냥하여 몇몇 협조인 동수들이 마주 앉아 원인을 찾아보았다. 결국 발견한 것은 한 사람도 정상적인 법학습과 연공을 보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결코 위축되거나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며 대법 일을 보다 잘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수련생을 구원하거나 박해를 부정하거나 상관없이 모두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법학습을 통해 나는 우리 지역 동수들에게 존재하는 일부 문제들을 찾았다.
1. 박해의 일부분을 중시하고 정체적인 박해를 소홀히 했다. 많은 동수들이 구원활동에 바빴지만 갑 동수에게 문제가 있으면 갑 때문에 바쁘고 을 동수에게 문제가 생기면 을 때문에 바빴지 누구도 자신이 바쁜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박해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힘은 끊임없이 분산되었는데, 어떤 수련생은 비록 자신이 박해받지 않았지만 가족이 입원하여 밤새 간호를 해야 했다. 우리는 이런 개별적인 박해 사례들이 모두 사악이 우리 정체를 향해 박해하는 구체적인 표현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모두들 구체적인 악인과 가족들에게 정력을 많이 쏟았지 정체를 이루지 못했고 공동으로 배후에 있는 사악의 정체적인 배치를 겨냥하여 부정하지 못했다.
2. 사람의 방식으로 구원하고 연줄을 찾고 정보를 얻는 것을 지나치게 중시했으며 굽은 길로 돌아갔다. 결국에는 여전히 연계하지 못했고 때를 지체시켰을 뿐이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큰 면적으로 진상을 알리고 도처에서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큰 면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데 힘을 썼다면 인연 있는 사람을 자연히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러분들이 어떤 때 문제를 고려할 때 모두 한 가지 습관을 양성했는바, 나는 한 가지 일을 할 것이고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이고 그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사고하는데 어이구, 스스로 아주 전면적이고 아주 원만하다고 여긴다. 일단 하려고 할 때 진정한 실제정황 그것은 변화가 무궁한 것으로 오히려 안 된다. (웃으심) 안 되면 또 다시 사고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정념을 이용하라, 당신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당신은 가서 하고 부딪친 문제를 당신은 자연히 어떻게 가서 해결해야 함을 알 것이다. 정념이 강하면 일체 모두 순조로울 것이며 보증하고 잘할 것이다.” (《대 뉴욕지역 법회에서의 설법과 해법》)
3. 악인을 폭로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지 3퇴 및 9평, 풍우천지행(風雨天地行 역주: 진상 동영상), 쑤자툰 등의 진상 내용을 소홀히 했으며 진상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을 보다 널리 구도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생각해보면 대법 자료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사람마다 모두 진상을 알리고 있었다면 사악이 여전히 창궐할 수 있었겠는가? 큰 면적으로 진상을 충분히 알리지 못했고 바른 마당을 펼쳐내지 못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두려운 마음이 중했기 때문이다.
4. 일부 협조를 맡은 동수(나 자신을 포함)들이 큰일을 하려는 마음이 중하고 자아를 실증하려는 마음이 뚜렷하여 일을 지도하려는 작풍과 안일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심각했다.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섞여 들어가 정념이 강하지 못했으며 사유는 늘 낡은 세력의 배치를 따라 갔고 낡은 세력의 배치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법학습이 충분하지 못했는데 단지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부족했다.
비록 이상을 종합하여 논술하긴 했지만 우리는 마땅히 최대한 빨리 집착을 제거하고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부족을 찾는 것과 자신의 정념을 강화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로써 우리를 순정(純淨)한 정념 하에서 전력을 다해 큰 면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속으로 투입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내가 법에서 깨달은 것으로 어쩌면 일부 방면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여러분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간청하는 바이다.
문장발표 : 2006년 10월 1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10/16/14015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