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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絶食]을 말함

글/중국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9월 16일】
내 기억에 처음으로 동수들이 감금 중에 단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슬픔을 억누를 수 없어 혼자 눈물을 흘렸다. 본래도 그렇게 사악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인 압력이 엄청나게 큰데 게다가 단식까지 한다면 동수들의 몸과 마음에 장차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들의 단식에 대한 지식은 책에서 내원한 것이다. 본래 당문화(黨文化)에서 유래한 다년간의 교육에서 형성된 관념이, 그것을 일종의 영웅적이며 용감한 행동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책 속에 등장하는 단식은 공산사당(共産邪黨)이 정권을 탈취하기 전에 사용하던 일종의 투쟁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오로지 공산당만이 개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에 일체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적에만 도달하면 된다고 여긴다.

우리는 누구에게 대법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와 투쟁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일체 행위는 단지 사람들에게 대법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리고 이해시키며 인식하게 할 뿐 다른 무엇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당신이 대법을 수련함은 본래 체포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은 도리어 불법으로 당신을 체포했다. 체포된 후에 당신은 그것의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단식에만 의지해서는 그것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사악이기에 당신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하여 선심(善心)을 베풀어 당신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하니 마땅히 빨리 이런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이에 나는 한 동수와 약속을 하여 구류소(拘留所) 소장을 찾아가 내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로 했다. 소장의 가족들 중에는 수련인이 많이 있었고 대법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기에 동수들의 환경도 비교적 느슨했으며 안에서 법을 볼 수도 있었다. 내가 동수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아주 시원스럽게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동수들과의 교류에 성공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사악이 단식을 겨냥하여 박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남자 동수들은 그곳(구류소)에서 감옥으로 이송되어 형사범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이후 대부분의 동수들은 밥을 먹었고 마음을 어기고 ‘수련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여자 동수들은 그곳에서 강제로 음식물 주입과 진한 소금물 주입을 당하여 대부분 다시 밥을 먹게 되었다. 동수들은 이렇게 큰 고통을 당했으며 게다가 원래 환경마저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속인들이 대법제자는 정말로 강하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속인식의 영웅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을 구도하려는 것이기에 사람을 구도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번 단식을 제안했던 사람은 구류소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환경이 바뀌자 비로소 먹기 시작했다. 당시 모두들 그에게 탄복했고 그의 행동을 인정했으나 나중에 그는 사오(邪悟)했고 아울러 일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자신을 따라 사오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종종 격렬한 행위에 대해 탄복하는 표현을 하기 쉽다. 나는 마땅히 법으로 가늠하여 진(眞)선(善)인(忍)에 부합되는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이야말로 관건이라고 본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깨어나라(淸醒)》에서 “대법의 어떠한 사업도 모두 사람이 법을 얻고 제자가 제고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의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3년 간 노교소에 있으면서 단식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나더러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은 자신도 단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동수들과의 정에 얽매여 참여하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여겨 법에서 고려하지 않고 크게 거들었다. 내 생각에 수련은 어떻게 깨달았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다.

나는 단식이란 기껏해야 일종 보조적인 형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가 정말로 일종 신(神)의 심태(心態)를 사용하고 망념(妄念)이 없다면 심태가 맑고 투명해져서 전혀 사악에게 흔들리지 않고 정기(正氣)가 호대(浩大)해져 족히 사악으로 하여금 바라보기만 해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하다면 표면적인 단식은 사실 외재적인 형식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내재하는 그런 정념이다. 만약 정말로 이런 정념에 도달할 수 있다면 사실 반드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단식을 할 필요는 없다. 이런 정념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그곳에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무엇을 말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모두 사악을 두려워 떨게 하여 당신을 빨리 집에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곳에 감금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들이 모두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때 정념이 단번에 그렇게 강한데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더욱더 어떻게 해야 최대한 빨리 자신의 정념을 강대하게 만들 수 없는가에 마음을 집중해야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단식이라는 소모(消耗) 속에 투입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하나의 수련자가 되려고 한다면,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그 마음에 의해 닦아야 하며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 의해 깨우쳐야 하는바, 본보기가 없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서 한다면 그것은 수련이 아니며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깨닫고 가서 하는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수련인 것이다.

최근 몇 년의 수련 중에서 시끌벅적한 일이 아주 많았으니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한다. 나는 단식 이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한번 깨달아보기를 희망한다. 단식을 이렇게 중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들이 한번 교류해보길 희망한다.

문장발표 : 2006년 9월 1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9/16/137916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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