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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에 대하여

글/광주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9월20일】 나는 수련하기 전 속인일 때 항상 남보다 더 잘하려고 했고 언제나 일등을 하려고 했다. 이런 허영심의 작용 하에서 마음은 협애했었고 자신을 들여다 볼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우월하면 곧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이러한 ‘동양 질투심(역주-Asian Jealousy)’이 나의 뼈 속 깊숙히 박혀 있었다. 기실 이런 질투심은 자신을 내세우는 낡은 생명의 일종 협애한 표현이다.

수련 후, 점차적으로 속인 중의 이익을 집착하지 않았다. 속인 중의 친구가 차를 사고 별장을 구입하여 출중하게 이름이 났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욕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난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며, 현대 사람들은 대부분 각종 욕망에 미혹되어 명, 리, 정의 집착 하에서 우주 특성에서 갈수록 멀어지고 있으며, 단지 자신에게 많고 많은 업력을 쌓는다란 도리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질투심에 대한 인식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자신은 속인처럼 질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마음을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련 중에서 이 마음에 부딪쳤을 때, 아주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 새롭게 반성하였는데 원래 이것은 그렇게도 강한 것을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표현은, 다른 수련생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능력이 강하면 칭찬하고 부러워하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해 유감스러워하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이 국외에 간 것을 보면 마음 속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나도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게 많은 작용을 발휘했을 것이다고 생각한다.(법을 실증하는 것을 기세 드놓은 활동과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실증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나도 국외에 가면 역시 거리에서 자료를 배포하고 여러가지 시위 행진에 참여할 것이다. 아무리 추워도 그만한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국내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료를 배포하여 사람을 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체를 인위적으로 나의 관점에서 분리하면서 어느 것이 나중이고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가르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이미 나의 더러운 사람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9년의 수련 기간이 경과했지만,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을 깊숙이 숨겨두고 자신을 과시하면서 질투심을 확대하였다. 질투심은 수련인이 필연코 제거해야 할 마음인 것이다.

이런 질투심은 언제나 자신이 우수하고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면서 마음을 비우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질투심은 나의 머리 속에서 엄중한 사상업으로 형성되어 나로 하여금 깨끗하지 못하게 하고 조용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질투심의 표현 방식은, 언제나 동수의 부족한 점을 보며, 법리로 수련생을 요구하고 심지어 질책하지만 자신을 찾기 싫어하는 것이다. 숨겨진 의식 속에서 다른사람이 자신의 요구에 도달하도록 한다. 모순이 발생하면 우선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은 왜 법에 있지 않고 지적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지적하지 않는 것도 ‘사(私)’라고 하셨으며 함께 전체적으로 제고하라고 하셨다.

이런 생각은 대법을 내세워 자신을 엄페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동수와 모순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집착을 찾으면서 동시에 동수의 집착도 찾으려고 한다. 마치 자신만 개변하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꼭 상대방도 이 모순 중에서 집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자신이 잘못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잘못도 찾고자 한다. 마치 자신이 묵묵히 수련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다. 이런 불평등해하는 질투심은 얼마나 강력한가!이런 자신의 사심을 수호하는 심태로 동수의 부족점을 지적하면 효과가 좋을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말투도 선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내심에서 우러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중 ‘경계(境界)’에서, ‘악한 자(惡者)는 질투심 탓으로 사(私)적인 것을 위하고, 화풀이를 위하며, 스스로 공평치 않다고 하노라. 착한 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거니,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깨달은 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노라.’ 라고 하셨다.

지금에야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일체 마음은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버린다.’ (《전법륜》)는 함의가 이해 되었으며, 전에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동수와의 모순 중에서 본래 착실하게 안으로 자신의 사람 마음을 찾으면 곧 제고한다. 이 모순도 헛되게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변한다. 그러나 질투하는 심태와 사유는 기점이 자신을 완전히 개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의식하면서도 상대방이 개변되는 것을 고집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표준, 소위 법리상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질책하고 원망하며 불평을 부린다. 심지어 속인의 표준으로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낀다. 또 다른 동수에게 그 동수의 잘못을 말한다. 묻건대, 자고로 이러한 방식으로 집착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투하는 심태와 이러한 조건이 있는 집착심의 제거는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취약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질투하는 심태는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의 위해성이 더욱 크다. 예를 들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서 자만해 하고, 자본이 있어서 자신은 특수하다고 한다. 또는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법을 실증하면서 어떻게 간고했고 어떻게 고생했다고 말한다. 동수들과의 배합중에서 상대방을 질책하고, 심지어 모두 대법의 법리로써 자신이 옳다고 우기면서 서로 간에 양보하지 않는다. 표면은 법리를 탐구하고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간에 쟁투(爭鬪)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질투심은, 자신이 제일이라고 하는 마음과 자신을 수호하려는 마음때문에 변이된 사심인 것이다. 어떻게 원용불파한 정체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선적으로 능히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부족점을 원만하게 보충해줄 수 있다. 질투심은 일종의 악념(惡念)이다.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자신이 이 점을 똑똑히 인식하고, 자신이 동수들의 비평을 잘 접수할 수 있으며, 듣기 싫은 소리일수록 들을 수 있고 접수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이는 안으로 찾는 것이다. 동수의 부족점을 질책하려는 마음이 떠오려면 곧 이것은 악념이라 하면서 배척해 버려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최근 수련 중의 체험이다. 층차가 제한되어 있으니,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하기 바란다. 허스!

문장완성 : 2006년 9월19일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9/20/13823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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