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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아하고’ 또는 ‘싫어하는’ 것을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글 / 타이완 대법수련생

[명혜망] 윤회 이야기에서 최면을 통해 전생의 은혜나 원한의 느낌을 회억하는 내용의 글을 읽은 뒤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은 이생에서 늘 언니에게 아주 많은 것을 주며 잘 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언니는 그녀에게 아주 좋지 않게 대하여 아주 섭섭하게 생각했다. 최면 상태에서 그녀는 전생에서 언니를 죽였던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이생에서 그 빚을 갚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은 후 나는 누구에게 집착심을 갖거나, 또는 누군가가 나를 잘 대하지 않는 것은, 더 높은 층차의 이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런 상황 뒤에 있는 진정한 이유는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이를 통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인 것처럼 느낀다.

나는 또 인터넷에서 최면 경험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최면을 거는 사람이 최면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당신이 깨어났을 때 내가 코를 만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가서 창문을 열어야 한다.” 그 사람이 깨어났을 때 최면사가 코를 만지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들은 최면 상태에서 그들에게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왜 창문을 열었느냐고 묻자 그들은 ‘너무 더워서’라거나 또는 ‘공기가 탁해서’ 등의 이유를 들었다.

사부님께서는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사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게 되는가? 현재 과학자들도 인간의 대뇌는 결코 사상을 생성시키는 근원(根源)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사람의 일념(一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속인 사회에서 배운 것이며, 자신이 분석(分析)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아니다. 속인이 그 일념(一念)을 움직여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사실 당신의 대뇌는 근본적으로 천천히 오래 (漫長) 심사숙고를 거치지 않았다. 아주 많은 일들은 입만 벌리면 즉시 나오게 된다. 이런 사유(思維)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리 수련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사실 사람의 사상과 수많은 공간의 요소들은 모두 관계가 있으며, 중대한 사건에는 인류가 다른 공간의 생명에 의해서 통제되어 해낸 것으로써 인류의 여기에서는 공연(表演)만 할 따름이다. 사람 육신의 표면 – 후천적으로 형성된 신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이지 아주 나약한데, 그들은 그들의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유를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인간을 통제하여 일을 하기란 너무나 쉽다. 실제로 인간이 이렇다는 것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 수련자들이 ‘무엇을 하기 좋아하고’ 또는 ‘무엇을 하기 싫어하는’ 그런 정들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완전하게 확신을 갖고 그것들을 수호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정말이지 그런 정에서 뛰쳐나온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지금 나는 ‘정에 빠지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인식한다. 정은 속인들을 통제하는데 쓰인다. 그렇다면 수련자로서 일을 할 때 우리가 정에 통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단 하나의 방법은 법공부를 더욱 자주 하는 것이다. 법은 이 공간에서 미혹을 돌파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더구나 우리의 매 하나의 생각을 법에 근거하여 본다면, 사물을 볼 때 자연적으로 순정한 마음으로 아무런 관념 없이 그들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수련자로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가져야 하고, 이러한 자비는 우리가 정을 내려놓은 후에야만 나온다. 우리의 자비 그것은 역사상 축적된 은혜와 원망에 근거하여 업력이 된, 좋다거나 싫다는 정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하게 일체를 박애로 해결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자비로 세계를 보노니
그때야 미혹 속에서 깨어나네.”

《홍음, 》

일부 수련생들 간에 나타나는 모순 역시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역사적 연원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가 수련에서 아직 없애버리지 못한 집착심을 우리에게 내려놓게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대법에서 수련해낸 자비는 일체의 모순을 분해하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막을 연출하고 있고, 감사나 은혜의 일체 정 역시 끝에 와 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가슴을 열 수 있고 모순이 있는 수련생들과 가슴과 가슴으로 대화한다면, 그 때 이것은 대화해(大和解)의 극이 되지 않겠는가?

실제로 다른 각도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인식은 수련에 따라 제고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층차에서의 인식에 따라 일을 한다. 대법수련 중 점차 저층 세계에서의 인간의 후천적 오염을 제거하고, 부동한 층차에서의 ‘좋다’거나 ‘좋지 않다’는 감성적 인식을 돌파한다면, 그리하여 제고된 층차에서의 이성적 인식에 도달하면 그 층차가 내보내는 지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발표일자: 2006년 8월 12일
원문일자: 2006년 8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6/7/4/132107.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8/12/767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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