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타이완 대법제자
[ 명혜망 2006년 8월 10일] 무엇이 정체인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정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 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같은 일을 하고, 함께 들어왔다가 같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법에서 모든 것을 법을 제 일위에 놓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서로 협조하는 것이 정체임을 알게 되었다.
모 지역에 정자가 한 군데 있는데, 매일 저녁마다 중국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그 지역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그 지역의 대법제자들은 당연히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곳에다 텔레비전과 전시판을 진열해 놓고 플래카드를 펼쳐놓은 다음 자료들을 배포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상을 하여 한 명의 중생도 빠짐없이 구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지역의 관리자들이 저녁 9시 이전에는 정자 안에 들어가 자료를 배부하거나 전시판을 전시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 지역 수련생들은 이에 대하여 부동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수련생은 이런 조치에 대해 접수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정자밖에서 자료를 배포하면 그들이 야경을 구경하고 나온 다음 다시 그들에게 자료를 주어도 별로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는 빈손으로 정자에 들어가서도 진상을 할 수 있고,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시판을 들고 자료를 배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분의 다른 수련생들은 교통을 방애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법제자들은 마땅히 어디서나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촬영하는 사람들조차 모두 정자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을 촬영해 주면서 돈을 벌 수 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들어 갈수가 없다는 말인가? 라고 인식하였다. 만일 그들이 규정한 대로만 협조할 경우 이는 사악에 대해 협조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한 번은 내가 그곳에 가서 진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기 전에 한 수련생이 말하기를 어떤 정념이 매우 강한 수련생이 정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진상을 하게 되어 지금은 능히 그곳에 들어가 진상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심으로 매우 기뻤다. 비록 나는 항상 최대한으로 책임자를 따르고 있지만, 그러나 내심 깊은 곳에는 나도 두 번째 동수의 관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자에 갔더니 책임자는 그래도 아직은 정자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와의 교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았는데, 처음에는 나와 함께 두 명의 수련생이 정자에 들어가 진상을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제지 당했다. 나는 빨리 나와서 발정념을 하면서 책임자가 고려하는 부분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그에게 협조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비록 우리가 공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땅히 그에게 협조하여 우리의 마당을 원용하여 순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인식하였다. 나는 일체를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비록 우리가 정자에 들어가서 전시판을 들고 자료를 배포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은 모두 인도 옆에 있는 텔레비전과 전시판을 보았고, 또 자료들도 아주 많이 나누어 주었다. 그 곳으로 왔던 거의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은 모두 진상을 알고는 놀랐다.
사부님께서 몇 번이고 협조에 배합하는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들이 잘 협조한다면 법력은 매우 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들 매 개인 모두가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지 않으면서 서로 협조하여, 하나의 진정한 정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생명, 층차가 높을 수록 그것의 체적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과립,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더욱 세밀한데, 곧 더욱 미시적인 것이다.”《2003년 정월 대보름 법회에서의 설법》 이 한 단락 법이 나로 하여금 한 대법제자가 대법입자로서, 만일 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내려놓고, 매 사람이 모두 하나하나의 미시적인 입자가 되어, 정체 중에서 보잘 것 없을 수록 더욱 협조를 잘할 수가 있다면, 이러한 정체는 법을 정시하는 작용을 더욱 크게 할 것이다.
나는 법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자신이 더욱 작아 보였다. 나는 석가모니부처께서 자신은 일생 동안 아무 법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은 자신이 말한 말들이 절대의 진리와 변하지 않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나는 모 수련생이 선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법에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상대방은 수련을 제대로 못했으며 나 자신이 그 보다 났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이번 워싱턴 DC 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나니 내심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표현이 좋고 나쁜 것은 모두 수련 중의 과정이며, 상대방의 수련이 잘된 부분은 이미 떨어져 나갔고, 수련되지 못한 그 부분이 표현되어 나와 나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수의 어떤 부분들은 수련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기타 부분은 아마 나보다 수련이 잘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좋히 못한 부분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상대방의 어떤 행위를 꺼려할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나에게 부족한 점이기에 나로 하여금 집착을 수련하여 없애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층차의 한계로,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문장완성: 2006년 8월 8일
문장발표: 2006년 월 10일
문장갱신: 2006년 8월 10일 00:48:28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8/10/13512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