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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私)’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말한다

【명혜망 2006년 8월 5일】내가 이해하기에 낡은 우주의 사(私)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관통된 것이며 신(新)우주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한 것이다. 나는 ‘사(私)’와 ‘무사(無私)’는 낡은 우주와 신우주의 근본적인 구별이며 오로지 ‘사(私)’를 제거해야만 낡은 우주를 벗어나 신우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낡은 우주 속에서 탄생한 생명이며 낡은 우주의 사(私)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관통된 것이기 때문에, 낡은 우주의 근원물질 속에는 모두 이런 ‘사(私)’가 녹아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이런 ‘사(私)’는 우리 낡은 우주 속에서 탄생한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뿌리가 매우 깊은 것으로 심지어 우리가 오늘날 만약 대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예 의식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 사상 깊은 곳으로부터 자세히 생각해보라. 당신의 매 하나의 일사일념, 당신이 한 매 한 가지 일에 모두 ‘사(私)’의 성분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속인 속에서 형성한 각종 집착심, 질투심, 과시심, 쟁투심, 환희심, 원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공로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등등의 뿌리는 모두 사(私)에서 내원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질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대방이 ‘나(我)’보다 강하기 때문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과시란 무엇인가?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에 떠벌리고 과시하는 것이다. 환희심이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얻었거나 혹은 ‘내’가 어느 방면에서 잘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만약 ‘사’가 없다면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집착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우리는 어떤 때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이런 ‘사(私)’를 행동의 동력으로 삼는다. 자신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사(私)’가 있다면 움직여서 가서 하고 ‘사’를 얻으면 기뻐한다. 반대로 자신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없고 ‘사(私)’가 없다면 하려고 하지 않으며 ‘사(私)’를 얻지 못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왜 가서 해야 하는가,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도 모두 ‘사’의 성분을 갖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낡은 우주 생명의 본원물질 중에는 모두 이런 종류의 ‘사’가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사(私)’를 지니고 수련으로 걸어 들어왔다. 왜 수련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로 수련성취될 수 있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자신이 수련원만할 수 있다고 느꼈기 여기는 등등이다. 당신이 마음을 조용히 하고 한번 생각해보라. 이런 것들은 모두 ‘사(私)’의 성분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 대법제자들은 수련 중에서 점차적으로 이런 근본 집착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을 제거하고 있으며 자신의 심태로 하여금 점점 더 순정(純淨)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또 많은 제자들은 아직도 이 근본 집착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면서 또 진상을 알리는 중에 이런 ‘사(私)’를 끌고 들어온다.

많은 사람은 아마 이런 심리가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하지 않는다면 정법노정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거나 ‘내가 하지 않으면 나는 보다 빨리 제고할 수 없다.’거나 ‘내가 이 일을 다 끝낸다면 장차 얼마나 큰 위덕을 세울 것인가’ 혹은 ‘이 사람은 어쩌면 내 세계 속으로 들어가 중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등등. 아울러 이로써 자신이 진상을 알리는 동력으로 삼고 있다.

당신이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위사위아(爲私爲我)가 아닌가? 이것은 자신이 원만하기 위해 대법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대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좋지 않은 마음인가!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여러 차례 낡은 세력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의 이런 행동이 낡은 세력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실 이런 낡은 세력은 엄격하게 이야기한다면 그것들은 정법 이 일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도 감히 망치지 못한다. 그것들의 목적은 비록 불순하지만 그것들도 정법의 일이 성공할 수 있게끔 하려고 한다. 단지 그것들은 이 일체를 그것들의 요구에 따라 하고 그것들의 요구에 따라 정법하려고 할뿐이다. 그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도와주는 동시에 그것들은 그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숨겨두었으며,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 하면서도 자신을 개변하려고 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움직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최대한도로 보전(保全)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품고, 이런 사심(私心)을 품고 가서 진상을 알린다면 이는 사부님을 돕는 동시에 자신이 원만하고 제고하며 성불(成佛)하려는 마음을 숨겨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낡은 세력이 하는 일과 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기까지 서술하면 어떤 사람은 아마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수련의 최종목적이 원만하여 성불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3가지 일을 동시에 잘해야만 보다 빨리 제고할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진상을 알림을 통해 자신에게 매우 큰 위덕을 세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맞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종 결과를 알려주신 것이지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는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또한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속인 중의 무엇이 아니다. 무위(無爲)적으로 청정(淸淨)하고 청정하게 한다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수련이란 필경 초상적인 것이다. 한 수련인으로서 말한다면 하루 종일 성불하려는 목적을 품고 부처 수련을 한다면 영원히 성불할 수 없고, 제고하려는 목적을 품고 제고한다면 도리어 제고할 수 없으며, 위덕을 세우려는 목적을 품고 가서 한다면 아마 그리 큰 위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사심(私心)’을 품고 하고 있기 때문에, 낡은 세력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낡은 세력은 ‘우리는 사심(私心)이 있고 당신도 사심이 있다. 당신 역시 대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덕을 세우고자 하고 자신의 원만을 성취하고자 하는데 당신과 우리 사이에 본질적으로 무슨 구별이 있는가, 왜 우리는 훼멸되어야 하지만 당신은 원만으로 나아가고, 위대하고 수승함으로 나아간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은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하며 당신을 박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낡은 세력이 당신을 배치하고 박해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당신이 낡은 우주의 특성에 따라 일을 하고 있으며 각종 사심, 두려움을 갖고 하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일을 했지만 위사위기(爲私爲己 사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한 것이라 낡은 우주의 특성에 부합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낡은 우주 특성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의 층차가 그것보다 높다면 그것이 당신을 박해할 수 있겠는가? 신(神)을 박해할 수 있단 말인가? 부처를 박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중생구도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 가서 하고 무사(無私)하게 가서 하며 신우주의 특성에 따라서 한다면 그것이 어찌 감히 당신을 박해할 수 있겠는가? 낡은 우주의 생명, 장차 도태될 생명이 어찌 신우주를 주재하는 생명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는 사심(私心)이 감소하는 과정이 바로 마음의 용량이 확대되는 과정이다. 사심이 감소한 정도는 바로 직접적으로 마음의 용량을 결정한다. 한 속인이라면 그는 가정에 사심이 있어 가정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가 국가에 사심이 있다면 그는 이 국가를 자신의 일부분으로 간주할 것이다. 심지어 한 신이나 부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나는 예수가 왜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석가모니 부처가 왜 반드시 열반을 해야 했으며, 노자가 5천언을 남기고 총총히 가버린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늘 한마디 말을 하였다.”

“내가 이 일을 해탈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처럼 그렇게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해탈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려움이 아주 커서 이는 당신들 어떠한 생명들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도로 나의 모든 일체를 포기할 수 있으므로 나는 이 일체를 해결할 수 있다.”(《스위스 법회에서의 설법》)

만약 우리가 정말로 자신의 사심을 없애버릴 수 있고 무사(無私)하게 정법을 하며 무사(無私)하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면 그럼 우리 마음의 용량과 우리의 공(功) 등은 장차 전반 우주 대궁(大穹)과 하나로 녹아들어갈 것이다. 그때에는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으며 견강하여 누구도 꺾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법과 진상을 알리는 것을 자신이 의리상 미룰 수 없는 책임으로 여기고 스스로 가서 중생을 구도하며 무사(無私)하게 가서 한다면(물론 위사위아의 마음은 시시각각 드러날 테지만 그것을 구분하고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강대한 정념은 일체 사악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그것들이 당신에게 접근할 때면 당신의 강대한 정념에 의해 모두 녹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우리 대법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법을 할 수 있다면 낡은 세력 및 일체 사악한 요소들은 장차 생존할 방법이 없으며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개인의 얕은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 2006년 8월 4일
문장발표 : 2006년 8월 5일
문장갱신 : 2006년 8월 1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8/5/13481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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