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중국대륙 대법수련생
[명혜망] 한 수련생이 “어떻게 법공부를 하는가를 배우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를 읽고 난 후 나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수련을 했지만 다만 어떤 점에서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내가 막 (수련의) 문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었다. “어떻게 법공부하는가”와 관련된 내 생각과 인식을 교류하고자 한다.
내가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 나는 법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내가 사부님의 《홍음 중 “실수(實修)”》에 나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
내가 무엇을 달성해야만 수련이라고 부른다고 잘못 이해했다. 나는 법공부가 수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책에 있는 원리에 의해 나의 집착을 비교하고, 그 후 이를 달성하고 나 자신을 청리한 후에는, 책을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더 높은 층차의 이치가 다시 나타났고, 그것은 내가 제거해야 할 집착심으로 나를 인도했으며 –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계속해서 층차를 제고해나갔다.
한 수련생이 내가 너무 조금 읽는다고 나의 문제들을 지적했다. 나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라고 답변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과 정신은 일성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한 수련생은 우리가 수련할 때, 우리의 생각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나쁜 물질을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공백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인간의 생각이 있을 때마다 이것을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인식하는 물질과 정신이 일성이라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판단하신다. 어떻게 해서 이 수련생이 이 구절로 하여금 그의 수련을 인도하게 되었을까? 나중에야 나는 사부님의 말씀에 더욱 깊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나의 수련을 인도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들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중에 비슷한 많은 현상들이 내게 일어났다. 책 속의 말씀은 기공의 좋지 않은 일부 현상들, 종교의 발전, 육식문제와 담배를 피우는 등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문제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것들은 모두 수련에서 나를 인도한다. 나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지만, 이 구절을 읽음으로 해서, 나는 여전히 법의 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속인들은 담배를 피우면 정신이 들게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관념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담배 피우는 것이 실제로는 해로운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병과 관계에서도, 이것을 단순히 병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부동한 층차에서 말하자면 속인들의 생각에 대한 집착 역시 병이다. 웹에서 한 수련생이 “불이법문”은 수련생들이 수련의 진정한 목적을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했다.
위에 언급한 것들을 이해한 후, 나는 아주 행복했다. 나는 마침내 법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나는 표면의 글자 뒤에 있는 법리를 보았다. 나는 법공부의 첫 효과를 이해했다: 법공부 자체가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법공부의 목적은 수련이다. 많은 동수들이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법공부할 때, 집중해야 하고, 집중하는 과정이 바로 머릿속의 혼란, 즉 낡은 세력이 그들에게 계획해 넣어준 한 매 생각을 포함해서, 인간의 욕망, 인간의 사념과 나쁜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통제가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들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내버릴 때, 사부님께서 당신을 위해 해로운 물질을 없애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마음 속에 나쁜 생각을 머물게 하고 졸리는 것이 우세하도록 한다면, 그때 법공부는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법공부할 때 다만 집중하라. 이것은 마치 당신이 더욱 높은 법리를 보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은 이미 많은 집착심을 제거했고 매 층차를 돌파한 것이다. 많은 집착심은 단지 한 층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층차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자연히 우리의 집착심을 약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법공부 하는 것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해한 후, 내게 법공부가 매우 즐거워졌고, 욕망은 점차 약해져 갔으며 – 나의 걱정하는 마음마저도 차분해졌다. 나는 법을 사용자의 소책자로 인식하곤 했으며, 색과 걱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같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참고서로 읽었다. 실제로, 이런 집착들은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아무리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다”와 같았다. 책을 계속 읽고, 책을 암기하고 테이프를 듣고 비디오를 본다면, 모든 집착들이 자연스럽게 제거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매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법이 일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조금도 과장이 없다.
한 시기 지난 후, 나는 심득교류 기사, “왜 수련에 정진해도 박해에서 제외되지 않는가?”를 읽었다. 나는 여기에서 약간의 통찰을 얻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마음은 한 층차이고, 법에 동화되는 것은 더욱 높은 층차임을 느꼈다. 당신이 속인 중에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은 완전히 공백일 수 없다. 속인 사회에서, 매 정보는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마음이 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어떤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도 당신의 마음을 교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노년 수련생이 계속해서 《홍음》을 낭송하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암송한다. 그때 그는 이미 법에 동화되어 있는데,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을 인식하고, 나 자신을 딱하게 여겼다. 마땅히, 《전법륜》을 암기하는 것이 더욱 좋다. 아미타불 수련 방법에서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다만 “아미타불”을 반복적으로 낭송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대법 수련에서, 높은 층차의 법을 계속 암송한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법공부로부터, 나는 마음을 통제하는 중요성을 인식했다. 《전법륜》에서 비자각적으로 사법을 연마하는 예가 내게는 연공 중 일부 사람들이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하는 연공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비자각적으로 사법을 연마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처음, 나는 정공 중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런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공을 하지 않고 법공부를 하지 않을 때도 마음에 나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파룬이 끊임없이 선회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연공하지 않을 때에도, 매 초 공이 연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공하지 않을 때, 만약 우리의 마음이 속인의 사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마음을 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 역시 비자각적으로 사법을 연마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 중, 만약 당신이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 이것은 당신이 강한 主意識(주이스)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인간 관념과 사상들이 자신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사부님께서는 아무것도 도와주시지 못한다. 사물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당신의 것이고 어떤 것이 당신의 것이 아닌가를 분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럼 무슨 생각이 당신의 것인가? 나의 인식으로는 법에 근거하지 않은 생각들은 모두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공부로부터만 그의 생각이 법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 반영될 수 있다. 다만 법공부를 한 후에만 그것들을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법공부하는 두 번째 효과로서, 집착을 인식하는 것이다. 동수들 대부분이 이미 이것을 알고 있다. 만약 정법 중의 대법수련생이 모든 것을 법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럼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낡은 세력이 배치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극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마음에 인간의 것들이 있다면, 사악은 당신의 인간의 것들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은 사악에 맞는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수련생이 기사를 썼는데, “진정한 생각을 실증하고,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라.” 이것은 동수들이 논의하기에 좋은 기사이다. 일부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나의 마음은 늘 걱정하고 있다; 나는 두렵다;” 또는 “나는 걱정하고 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실제, 이런 생각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주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세상에서 얻은 관념의 결과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을 당신 자신으로 본다면, 그때 당신은 그들을 당신에게 머물러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당신이 그것들을 어떻게 제거하겠는가? 당신이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닌 것들을 볼 때면, 바로 당신의 마음에 말하라, “그것들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면 발정념할 때 그것들은 저절로 제거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관찰들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제로 사부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것들을 인식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한 수련생이 쓴 것과 같다. “마침내 긴 전투 끝에 나는 인간관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적이란 바로 생각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뿐이다!” 실제 깨달음은 진정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가 이를 말하게 되면 평범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나 자신 역시, 그처럼 오랫동안 법공부를 한 후, 그리고 법은 정말로 무엇이든 일체를 할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 인식했다. 이 기사를 쓴 후, 나는 갑자기 내가 법 안에 있을 때는, 신들 중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고 법의 위대함을 갑자기 느꼈다.
발표일자: 2006년 7월 23일
원문일자: 2006년 7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6/6/10/129957.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7/23/758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