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허난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6월 2일】지금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대법제자들에게 “당신은 사부님을 믿는 가요?”라고 물어본다면 대법제자들 모두는, ‘어찌 사부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만약 누가 나에게도 똑같이 묻는다면 나 역시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수년간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을 헤쳐 나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 대법제자들 누가 사부님을 믿지 않겠는가?! 누가 법을 믿지 않겠는가?! 어찌 단순한 믿음뿐이랴, 이는 확고한 믿음, 견고한 믿음이다.
몇 년간 명혜망을 통해 동수들의 체득을 읽고 또 동수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사부님에 대한 믿음”이란 단어를 나는 많이 보았고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나에게 아직 사부님을 믿지 않는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도 못해봤다. 특히 이 몇 년간 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 시련을 겪으며 걸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는 내가 대답할 필요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러한 문제를 묻는다면 바로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인간과 신에 대한 수많은 어려운 선택을 겪으며 나는 거대한 재난으로부터 걸어 나왔고 사악의 박해로부터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굽은 길을 그리 많이 걷지 않았고 큰 실수도 한 적이 없기에 자신의 수련은 그래도 괜찮고 오성도 괜찮다고 느꼈다. 그러나 오늘 나는 갑자기 나의 수련이 너무나 한심했다는 것과 나의 문제가 너무 컸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에게 아직도 이토록 엄중한 문제가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 나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수련한지 7년이 넘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놀랍게도 한번도 의식하지 못했다. 무슨 문제인가? 바로 사부님을 믿는데 대한 문제였다.
사부님께서는 법 중에서 공을 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매 수련생의 몸 뒤에는 모두 나의 법신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부님께서 연공마당을 말씀하실 때 “나의 법신들이 한 바퀴 둘러앉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법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믿고 있으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절마다 모두 진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단지 매우 표면화가 되어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다. 단지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해주셔서 내가 알게 되었지만 진정한 믿음은 경지의 체현이며 수련해낸 것이었다. 연공의 마당에는 사부님의 법신이 한 바퀴 둘러앉았지만 우리가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내가 정말로 사부님의 법신이 한 바퀴 둘러앉았다고 인정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로 시시각각으로 사부님의 법신이 진실하게 나의 몸 뒤에 서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마치 자신의 몸 뒤에 거대하고 우람한 사람이 서서 시시각각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가족 중에 여럿이 수련하고 있는데 내가 정말로 집안에 여럿의 사부님의 법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가? 작은 규모의 법회에서 내가 정말로 사부님의 법신 역시 한 바퀴 둘러앉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속인의 관념과 같은 그러한 진실감이 존재하는가? 없다.
속인 중에 이런 한 마디가 있다. “신이 항상 같이하고 있는 것처럼 공경하라.” 신이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고 공경하고 대해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하였는가? 기억 중 어린 시절 어른들께서 상을 차린 후 맛을 볼 엄두도 못 내고 먼저 신령님께 공경을 드렸다. 무지한 어린이들이 한 몇 마디에도 어른들은 엄숙하게 다스렸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 어린이들이 마치 무슨 큰 죄를 범한 것 같았던 것이다. 수련한지 몇 년이 되었지만 사부님께 대한 나의 믿음은 과거의 노인들께서 신을 공경했던 그러한 마음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내가 사부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생각해 보았다. 비록 사부님께서 형식상에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시진 않았고 이곳에서 여러분들에게 무슨 형식을 취하자고 제안하는 것 또한 아니다. 대법이 걸어가는 길은 “대도무형”의 길로서 우리들은 최대한도로 속인의 형식에 부합되어 수련해야 하며 우리들의 길 역시 미래에 남겨두는 것으로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들이 정말로 사부님께서 바로 우리 신변에 계신다고 믿고 있으면, 정말로 그러한 정도까지 확고하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곧 어떻게 사부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최소한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항시 사부님께서 계실 것이다.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우리 곁에 계신다고 확신한다는 이러한 믿음은 결코 입으로 말만 하거나 알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 안 되는 것임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러한 믿음은 경지가 승화된 후에 체현되어 나오는 것이며 수련해낸 것으로서 장기간의 수련기초가 없이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5월 22일 명혜망에서 한편의 문장을 실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 수련생이 손자에게 토마토를 먹였는데 토마토가 목에 걸려 숨을 쉬기가 어렵게 되자 손자의 얼굴은 급기야 청색으로 변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손자의 아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엄마는 급해서 울기만 했다. 당시에 그 수련생은 매우 진정했으며 큰 소리를 사부님을 부르며 “사부님께서 도와주십시오. 빨리 어린이가 토마토를 뱉어내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자 방울토마토는 곧 어린애의 입으로부터 굴러 떨어졌으며 어린애는 구원되었다.
이 예로부터 나는 이 수련생이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정도를 보게 되었다. 만얀 병업의 형식으로 사악들에게 인체를 빼앗긴 모든 수련생들과 사악에게 혹형을 받아 사망된 동수들이 사부님께 대해 아주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사부님께서 바로 자신 앞에 진실하게 서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러한 경지의 믿음을 갖고 있으며 고난 속에서 그들이 사부님을 부른다면 내 생각에 사악들은 절대로 그들을 건들지 못할 것이다.
심성이 얼마나 높으면 공이 얼마나 높다. 사부님께서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바로 눈앞에 서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사부님께 대한 믿음이 이러한 정도까지 도달되고 고난 속에서 우선 사부님을 생각한다면 사부님께서 어찌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이것은 사부님께 대한 믿음 문제가 아닌가? 우리가 이토록 수련했어도 무엇을 수련해야 하는가? 바로 사부님께 대한 믿음이 아닌가?
아, 부끄럽도다. 수련을 이토록 했어도 이제야 이를 깨달았으니, 사존님을 뵐 면목이 없도다!
문장완성: 2006년 5월 31일
문장발송: 2006년 6월 2일
문장갱신: 2006년 6월 1일 13:20:06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출처: http://minghui.ca/mh/articles/2006/6/2/1293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