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캐나다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5월 26일] 캐나다도 천국악단을 조직하게 되어 나도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음치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그냥 구경하러 그들이 연습하는 장소를 찾아갔다. 연습장으로 들어가 수련자들이 여러 가지 선율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이 정말 수고를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수련자들은 음악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으므로 배우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어떤 수련자는 입이 부르텄고 또 어떤 수련자는 악기를 들고 어찌 할지를 몰라 급해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특히 나에게 감동을 준 소고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아주 빠른 소고의 절주를 따라가느라 아주 힘들게 연습하는 모습이었다.
“뚱뚱” 북치는 소리에 나는 마음 속으로 기뻤다. 그러면서 속으로 꼭 소고를 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미 사람이 찼다는 대답에 나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울뻔 했다. 마치 생명에 소중한 것을 잃은 느낌이었다. 왜 그때 사람의 관념의 집착으로 기회를 놓쳤는지 정말 후회스럽다. 직접 보고 느껴야 믿고, 잃어버리면 또 고통스럽고 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이런 아쉬움이 있게 되어 나는 수련의 길에서 이미 오랫동안 있어온 누락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눈으로 본 것에만 집착했고, 언제나 사람의 관념으로 지배되었던 것이다.
대륙에 있을 때 한번은 중국 당 문화에 흠뻑 젖어 든 여자를 만났다. 내가 파룬궁이란 말을 꺼내자 그는 경각성을 높이며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문뜩‘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금방 다른 말로 돌리고 파룬궁을 다시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이 일을 어떤 동수에게 말했더니 그 수련생은 꼭 그런 것도 아닐 것이라며 자기가 한번 가서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 돌아와서 그 수련생은 나에게 그 여자분이 공산당을 이탈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 동수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냐고 묻자 하는 말이 거의 내가 한 말과 비슷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수련생은 나에게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맞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오직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탈당하고 나서 그 여자분은 이 동수와 포옹도 한번 했다고 한다. 사람의 그 깨어있는 부분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분에게 진상을 할 때는 마음 속으로 결과를 정해놓고 그냥 한번 말해본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사람의 관념으로 내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해수로는 수련한지도 오래 되었지만 아직 “논어”에서 사부님의 말씀, 자신의 우매한 견해로 그어놓을 틀 속에서 기어다닌다는 말이 다시금 나를 비추어보게 한다.
나의 관념으로 가로막아 구원받을 기회를 잃은 사람들, 심지어 친척들은 장래 진상이 크게 들어날 때, 그들의 후회와 고통은 어떻게 이루 말 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은 나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어 무수한 중생이 구도받을 희망을 나에게 맡겨주셨는데 나는 사람의 관념으로 한번한번 묻어버리면서 나의 수련의 길에 숱한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 십년을 수련해온 내가 무엇을 수련했단 말인가. 단지 개인의 원만을 위해서란 말인가. 깊숙이 감추어진 마음은 언제 제거할 수 있을까. 자기를 속이는 격이라. 사부님의 자비를 자기의 보호막으로 여겼던 것이다. 한번은 꿈 속에서 후추알을 하나하나 주어먹는 것을 보았다. 글자를 거꾸로 읽으면 교활 아닌가(중국어로 후추를 거꾸로 교활 이라고 읽는다.) 속인 속에서 교활은 사실 제일 우매한 것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아하고, 고생스럽고 위험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혼자만의 안일만 추구했고 하루에 정법 일을 좀 했다 해서 그것을 3가지 일을 한 것처럼, 한 손에 사람을 안고, 한손으론 신을 부둥켜 놓지 않으니 말이다. 진정으로 걸어 나옴은 바로 진정으로 사람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관념을 포기해야만 비로소 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속인이 대법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므로 사부님과 주고받고 거래하자는 심리다.
여기까지 인식하고 보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들은 느낌이다. 정말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마침 화려한 옷을 걷어내어 진정한 자신을 본 듯하다.
속인에서 위대한, 그리고 무한위덕이 구비된 신으로 수련하는데, 사부님은 이미 우리에게 위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놓아주셨다. 스스로 오를 수 있고,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법학습이며 또 법학습이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자기의 마음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바, 수련의 길에는 어떠한 우연한 일이 없다. 자신을 내려놓고, 중생을 생각하는 마음이면 시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수련의 벽이 된다. 마지막까지도 우리에 대한 검증이 존재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이 있으시다. 스스로에게 마지막의 고험 앞에서 꼭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생각마저 아주 우습게 여겨진다. 마침 평소 공부를 게을리 하던 학생이 기말 때 100점을 기대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수련은 제일 엄숙한 고험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속인의 그 어떤 고험보다 어렵다. 어려운 원인은 커닝도 할 수 없고, 유일무쌍한 길로 본뜰 수도 없으며, 벼락치기로 한꺼번에 층차를 제고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일분일초 착실히 닦아온 것이며, 일사일념 일거일동은 모두 점수를 누적하는 요소이다. 만약 평소의 점수가 합격 이하이거나 심지어 0점을 맞았다면 최후의 검증에 합격은 불가능하다. 원만은 수련해낸 것이지 기다려 온 것이 아니다. 사부님이 마지막 끝까지 우리의 길을 배치해 주셨다. 각양각색의 마음을 제거하지 않음이 마치 문제 하나하나를 풀어내지 못하듯 마지막 시험을 어떻게 보겠는가. 사부님이 그 제거하지 못한 부분을 없애주기 바라는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해야 한다.
개인의 체험이므로 마땅치 못한 부분은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이 있기 바란다.
문장완성:2006년 5월 25일
문장발표:2006년 5월 26일
문장갱신:2006년 5월 25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5/26/12879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