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전(史前)의 큰 소원을 이루고 정법노정을 따르자

글 :대법제자

【정견망 2005년 4월 18일】 “쑤자툰 지역에서 조사 기간 동안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의 발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오늘날은 대법제자들이 ‘건곤을 주장하고 인도(人道)를 바르게[主掌乾坤正人道]’하는 시대인데 어찌하여 속인의 행동에 의해 불평을 터뜨릴수 있는가?

후진타오와 부시 회담이 있기 전에 중공 사령(邪靈)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서 산채로 장기를 적출한 사건이 폭로된 후 미중 회담의 중요성과 특수성을 더욱 느끼게 한다. 대법제자들이 이 기회를 틀어잡고 최대한도로 세인을 구도하려는 것은 잘못이 없으며 인간의 일체 형식을 이용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주도적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중생구도는 대법제자만이 할 수 있으며 속인의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기점이 틀리지 않았다면 미국 정부가 소위 ‘쑤자툰사건을 조사했어도 증거가 없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은 미국의 수치이자 완전히 황당무계 말임을 알고 있다. 그래 당당한 미국정부(세계 인권의 상징)가 이것도 알지 못한단말인가?

인간 세상의 일체표현은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에서 촉성(促成)된 것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한 후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반성해야지 속인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수련 상태를 제때 수정하지 못한다면 후과(後果)는 더욱 엄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계속하여 기점을 부시에게 놓거나 혹은 미국 정부와 유엔에 놓는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다. 부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국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엔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는 완전히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건이 아무리 엄중하고 시간이 아무리 긴박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기점을 바로하여 속인에게 끌려가지 말아야하며 일을 하되 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정법형세는 신속하게 발전하고 있고 우리에 대해 법에서 법을 인식하라는 요구는 회피할 수 없는 것임이 명확히 드러났다. 중공 사령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서 산채로 장기를 잘라내 폭리를 취한 악랄한 사건이 폭로되었다. 사건의 참혹함이 사람들의 심리와 생리적인 감당능력을 초월하였기에 본능의 첫반응은 이 일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공산 사령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사유방식으로 발생한 일을 본다면 이런 반영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평》이 발표되어 공산 사령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사람들이 똑똑히 알 수 있게 역사적인 화면으로 부각시켰다. 누구라도 착실하게《9평》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산 사령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사건이 폭로된 후 적극적으로 사악을 폭로하여 세인을 구도하지 못하고 소위 증거와 사람의 심리 및 생리적 감당능력에서 걸어나오지 못하는가? 우리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대륙 동수들의 생명과 중생의 훼멸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우리는 중생 구도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만 이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는가? 낡은 세력은 오늘을 위하여 역사의 아득히 먼 이전부터 우리의 일사일념을 포함하여, 세밀하게 일체를 배치했다. 왜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법은 근본적으로 일체를 개변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법에서 수련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낡은 세력의 배치를 바로 타파할 수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곧 정법시기의 대법제자가 아니다.

정법수련은 거시적인 면에서 우리의 중점을 중생구도에 놓았기 때문에 개인 수련을 더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끝으로 갈수록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는 더욱 높고 더욱 엄하다. 대법의 정체(整體)는 개체로 형성된 것이기에 우리 개인의 수련 상태는 정체의 상태를 결정하며 인강세상의 표면 현상을 결정한다. 이런 표면 현상은 또 매 대법제자에게 반작용을 한다. 정법수련은 매 대법제자와 정체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며 더욱이 “대법은 중생을 원용하고 중생도 대법을 원용한다.”(《도법》)를 더욱 부각시킨다. 이때 만약 우리가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반박해(反迫害) 중에서 우리 자신도 걸어나올 수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중생 구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수련은 자신을 정화(淨化)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순정(純淨)한 정도는 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결정한다. 정법수련 중에서 자신의 수련을 잘하고 자신을 순정히 해야만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고 정법노정을 따라갈 수 있다.

우리가 개인 수련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개인 수련과 정법 수련의 의의를 소홀히 했다. 대법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자아 의식이 팽창하여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법을 떠나버렸다. 정법수련 중에서 능력이 있는 수련생은 실천하는 공간이 있다. 사실 우리도 이런 ‘인재’들이 필요하다. 시간의 긴박함, 인재의 필요성, 일의 번잡함은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법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정법노정의 추진과정에 어떤 때 우리는 성적이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에서 온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수련 중에서 새로운 관념과 집착이 형성되었고 관념의 작용하에서 우리는 늘 법의 내포를 잘 보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근본상에서 일체를 개변하고 일체를 바로잡는 것은 대법임을 믿는다면 자신의 사람의 관념과 자신이 수련중에서 형성한 새로운 관념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매 한 차례 동수 사이의 모순을 자신의 씬씽(心性)을 제고하는 기회로 삼고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으며, 모순 표면의 시비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마땅히 제고해야할 요소만 찾는다면, 법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진정으로 사부님을 존경하고 법을 존경하며 3가지 일을 잘하고 어긋나거나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능히 조사정법(助師正法) 하려는 사전의 큰 소원을 이루고 정법노정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정견망에서 퍼옴]

발표 시간:2006년 4월 18일
원문: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4/18/36542.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