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겨울에 밖에서 연공 할 때 장갑을 끼다”란 글 중에서 다시 깨달은 법리

글/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3월 19일] 한 동안 동수들에게 안전조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두 가지 부동한 인식이 있었다. 하나는 안전주의에 대한 조치로 표면상에서 보면 바로 다른 동수에게 안전에 주의할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념을 강조하는 것인데 특히 이 부분에서 이른바 ‘정념’을 견지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들은 ‘신의 사유’를 강조하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나는 다만 이 구절로 간단히 개괄하는 수 밖에 없다). 진짜 속인의 관념을 버리고 실질을 보게되면 가상을 포기하고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법으로 문제를 가늠하는 것처럼 깨달음이 대단히 옳은 것 같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견지하며, 자신이 하는 것이 진정으로 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더욱이 뒤의 인식은 표면상에서 볼 때 마치 법리에 아주 부합되는 것 같지만 앞의 인식은 오히려 법으로 원만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 때문에 비록 모두들 표면상으로는 쟁론하지 않지만 두 가지 인식 모두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없었다. 비록 후에는 관념을 가지고 있던 수련생이 점차 안전조치에 주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법리적인 모호함으로 말미암아 내심으로 진정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개별적인 동수들은 여전히 자기 뜻대로 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두려움이 있다고 여긴다.

한동안 나 또한 속인의 안전조치는 다만 표면의 것들이며, 외부에서 일어난 하나의 조건이라고 여기면서 사악이 틈을 타는 것은 심성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왜냐하면 일체가 우리 마음이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수들이 했던 많은 의견에 나는 완전히 찬성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법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법리상에서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동수들이 말하는 많은 인식들이 법리적으로 나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도 안전에 주의하고 있지만, 왜냐하면 우리가 속인 속에서 수련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속인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안전조치에 주의를 두는 것은 사악이 틈을 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악이 틈을 타고 박해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에게 있는 누락을 반성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미 손실을 입게 된 뒤였다. 실제로 이런 교훈은 너무나 많았다.

나는 또 많은 동수들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는 다들 자신에겐 정념은 있으나 두려움은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에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데 문제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정체적 손실을 만회할 수 없게 된 상태인 경우가 허다했다. 교훈은 비통한 것이다. 사악이 파괴한 많은 사례들을 보게 되면 모두가 표면적 안전상에 엄중한 문제가 생겨 조성된 것들이었다.

내 기억으로 한 동수의 체득담이 생각난다. 그는 안전조치에 대해 중시하지 않으면 마치 법속에서 말하는 손에 대법책을 들고 큰 소리로 “리(李) 스승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과 같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수련생이 말한 것이 틀렸다고 여겼다. 어찌 그렇게 비유할 수 있는가? 이는 대법제자를 속인에 비유하고 사악을 자동차에 비유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악이 대법제자 보다 강하다는 말이 아닌가? 사악이 우리 앞에서 다 무엇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생각이 너무나 우습다.

기실 마음을 조용히한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수련생이 한 말은 아주 맞는 말이었다. 몇 년간 정법속에서 얼마나 많은 수련생이 ‘정념이 있으면 아무일 없다’, ‘사부님의 보호가 있으면 아무일 없다’라고 했던가,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몇 명이나 무사했는가?! 일이 생기면 개인 문제인가? 너무 많은 동수들은 진정으로 청성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데 이는 너무나 안타깝다. 속인들을 보게 되면 자동차는 사람을 치어서 죽일 수 있다. 그 손에 대법 책을 들고 거리에서 “리(李) 스승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고 떠들어 대던 자를 사부님께서는 법속에서 “이것은 대법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속인 속에서 수련하면서 전화 도청을 당할 수 있고, 핸드폰은 감시 당할 수 있으며, 악한 자들은 신고할 수 있고, 악인은 구실을 찾아 또 체포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안전에 주의하지 않고 “우리는 신이기에 사악이 우리 앞에 올 수 없다, 괜찮다.” “스승님이 계시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대법제자는 신이 아닌가, 마땅히 정정당당하게 해야 한다,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한다. ‘정정당당하게’ 라고 여기면서 상황에 대한 아무런 고려없이 가서 하는데 이것은 그 손에 대법책을 들고 큰 소리로 “리(李) 스승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 그런 사람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이것은 대법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닌가? 몇 년이래 사악이 틈을 탄 것이 적었는가? 각 자료점이 파괴 당한 것이 적었는가? 얼마나 되는 피의 교훈이 아직도 우리로 하여금 정신 못차리게 한단 말인가?

우리의 이지적이지 못함이 사악에게 이용되어 사부님의 정법을 교란하게 했고, 낡은 세력의 흑수로 하여금 사악에게 자료점을 파괴하는 목적을 이루도록 했으며, 대법을 파괴하도록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어리석도다! 우리는 또 자신의 이지적이지 못한 사상과 행위를 정념이 강한 표현으로 여겼으며, 깨달음이 좋고, 인식이 높다고 여겼다. 사부님께서 법속에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오성이 너무 낮아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자신의 잘못된 것을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법공부를 하면서 사부님께서 겨울에 연공을 할 때 장갑을 끼고 하라는 말씀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자신의 과거에 존재했던 과격함과 협애했던 인식들, 그런 강조하는 이른바 정념,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그러한 행위들은 기실 정체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과격한 작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련생이 어떻게 인식했던지 그것은 개인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사부님께서 법회에서 “안전에 주의하라”하셨으면 “안전에 주의하는”것은 긍정코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럼 우리 개별적인 동수들은 왜 아직도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가? 비록 명혜망에서 안전조치를 홀시하여 비통한 손실을 본 문장들이 줄곧 끊기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부 동수들이(특히 자신이 “수련을 괜찮게 했고, 바르게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동수들) 과격한 관념과 작법을 근본적으로 개변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겼했다. 무엇 때문인가?

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나는 그들의 법에 대한 견정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감수가 너무나 컸다. 환골탈태하면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그런 감수, 그런 상태, 그런 법에 대한 견정한 신념들은 이미 생명의 근본으로 되어 이미 생명의 줄기로 되었다. 그럼 무엇이 개인 관념인가? 몇 년 사이 사악의 박해로부터 걸어 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마음의 극한을 돌파하는 간고함을 뚫고 나온 뒤의 홀가분함으로 바꾸었고, 속인의 불가능함을 수련인의 가능함으로 바꾸었던가, 무엇에 의거했었는가? 의거했던 것이 바로 그런 강대한 신념과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견정한 마음이었다. 몇 년간의 시련에서 증오(證悟)해낸 법에 대한 견결한 믿음!이 틀렸단 말인가? 개개인은 모두 자신이 증오(證悟)해낸 법리가 있고, 개개인이 증오(證悟)해낸 법리가 모두 다르다. 왜 자신이 여기는 저층인식과 작법에 부합되려고 하는가? 틀렸는가? 하지만 사부님께서 하신 <<미국동부 법회에서의 설법>>중의 한단락은 나에게 틀렸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게 했다.

“너무 추운 날에는 당신이 장갑을 끼고 연공하도록 하며 동상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 연공인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어떤 사람은 연공하면 당신이 동상에 걸리게 된다. 왜 이렇게 하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라. 대법은 억지로 수련할 수 없으며 사람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대법을 수련하는 중에서 많은 신수련생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법공부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크고 그렇게 높은 깨달음과 그렇게 높은 층차가 없다. 또 시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꼭 수련하러 왔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진짜 수련하는 제자로 대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동상에 걸렸다면 법을 심하게 영향주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가 방금 입문했고 방금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그가 수련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정할 수 없다. 그가 실험해 보려는 마음이 생겼을 때 단번에 동상에 걸리는데 그럼 그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 수련 중에 끊임없이 신수련생이 들어오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기어코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럼 그에게 동상에 걸리게 한다. 실제상 또 한 면에서 그를 도와 업력을 제거하고 있고 한 면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를 점화해 준다.”

몇 년간 나는 줄곧 이것은 사부님께서 그런 금방 입문한 수련생들을 타이르는 것이라고만 여기면서 그렇게 높게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을 진정한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겨울에 연공할 때 동상을 입지 않도록 장갑을 껴야 한다. 나는 줄곧 이 한단락 법이 정진하는 제자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인식이 전혀 아니다. 몇 년간 정법 수련을 해온 시련 속에서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이 한단락 법의 더욱 깊은 내함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과거 나는 다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실 연공인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 “왜냐하면 대법을 수련하는 중에서 많은 신수련생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법공부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크고 그렇게 높은 깨달음과 그렇게 높은 층차가 없다. 또 시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꼭 수련하러 왔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진짜 수련하는 제자로 대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동상에 걸렸다면”, “왜냐하면 그가 방금 입문했고 방금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그가 수련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정할 수 없다”에만 주의했었다. 이제야 나자신이 편면적으로 이해하고, 단장취의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나는 이 단락의 표면 뜻 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부님께선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다. “너무 추운 날에는 당신이 장갑을 끼고 연공하도록 하며”, “동상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너무 추운 날에 장갑을 끼지 않고 연공하는데 “여러분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기어코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럼 그에게 동상에 걸리게 한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것으로 우리를 점화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점화해 주시는가? 나는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 남을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신수련생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며 이것은 타인을 위해 생각함이라고 이해했다. 그렇다, 수련인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모두 장갑을 끼지 않는다면 신수련생들은 가능하게 따라 할 것이며 그가 오성이 그리 높지 못한데 “그의 마음이 실험해 보자고 생각했을 때 단번에 동상에 걸리는데 그럼 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영향이 얼마나 큰가? 그가 법을 믿지 않을 것이고 수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사람에게 법을 얻게 하는 것 뿐이지 사람을 밖으로 내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중 하나다.

두 번째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가 동상에 걸렸다면 법을 심하게 영향 주는 것이 아닌가?” 고 하셨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가 동상에 걸렸다면 그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여전이 속인이 아닌가, 그가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더욱 많은 사람들이 법을 얻는 것을 영향주지 않겠는가, 다른 수련생들이 보고 교란 받지 않겠는가, 그가 법을 교란한다면 이는 부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가, 법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법을 얻는 것과 구도 받는 것을 첫자리에 놓아야 하고, 대법을 첫자리에 놓아야 하며, 정체 제고를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점화해 주셨다. 우리는 단독 수련이 아니며, 자신이 혼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체이다. 수련하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생각해야 하며 단지 자신이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만 생각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 해 얼마나 많은 노수련생, 보도원들이 동상에 걸렸는가? 동상에 걸렸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하신 “연공인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는 말씀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자신이 어디에 잘못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만일 이 보도원이 나는 신수련생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시련을 겪은 진수제자가 아닌가, “연공인은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신이 어찌 동상에 걸린단 말인가? 속인은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고 배고파도 안 되고 힘들어도 안 된다. 허나 나는 진정한 수련인이다. 진정으로 수련의 내함을 알고, 생명이 존재하는 의의를 알며, 사부님을 견정하게 믿고, 법을 믿기에 동상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한 것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표면의 말은 법리와 부합되는 듯 하지만 그는 확실히 틀렸다.

겨울에 연공할 때 장갑을 껴야 한다는 이 단락의 법이 정법 중에서 체현해 내면 바로 우리가 사악한 환경속에서 법을 실증함에 있어 안전에 주의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법과 정체를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부동한 경지에 있는 동수들도 생각하여야 하며 더욱이 신수련생의 제고를 위해 생각해야 하며, 세인이 법을 얻는 것과 속인 속의 친지나 친구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담은 것은 전 우주의 중생이다. 우리는 중생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체는 모두 중생이 잘 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되도록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부당한 작법으로 세인과 중생들이 구도될 기회를 잃는 것을 되도록 피면해야 하며, 심지어 우리의 타당치 못한 작법으로 그들이 대법에 죄를 짓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다. 우리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과격한 행위가 도리어 낡은 세력의 흑수에게 이용되어 사부님의 정법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수련생이 박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허나 우리의 과격한 작법 때문에 낡은 세력의 흑수가 독한 마음을 품고 틈을 타고 들어와 우리의 동수들을 박해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과격한 행위는 낡은 세력에게 이용되어 그들을 해치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감히 배우지 못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대법에 대하여 오해를 하게 하고 대법에 죄를 짓게 한다.

기실, 만일 한 수련인이 정말로 일마다 법의 표준으로 가늠하고, 일을 함에 있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하며,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 대법을 첫자리에 놓을 수 있고 중생이 법을 얻음을 첫자리에 놓을 수 있다면 영원히 비뚤게 나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개인 인식이다.

문장완성: 2006년 03월 16일
문장발고: 2006년 03월 19일
문장갱신: 2006년 03월 19일 03:32:08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3/19/123085.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