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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사악에 굴복당하지 않는다

글/랴오닝 번시 대법제자

【명혜망】동수와 교류할 때 늘 생사를 내려놓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들 법을 얻었는데 무슨 죽음이 두렵겠냐고 여기는데 생사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또 눈에 보이는 확정된 물건으로 자신이 도대체 생사를 내려 놓았는지를 가늠할 수 없어 인식이 모호해졌다. 이는 마침 법공부가 깊지 못한 표현이다. 후에 나는 경찰에 납치되었고 마귀굴에서 나온 후 비로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생사를 내려놓음의 깊은 법리에 대해 이해가 있게 되었다.

생사를 내려놓다를 법리에서 인식해야 한다. 노자가 말한 ‘아침에 도를 들어니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와 불교의 열반은 모두 생사를 내려놓음을 말하고 있으며 모두 사람과 결렬한 경지이다. 대법수련자가 혹독한 사악한 환경에서 더욱이 생사를 내려놓을수 있는 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련 중의 사람은 혹은 많이 혹은 적게 사람마음이 있다. 진상을 알리거나 혹은 진상자료를 발송할때 사람마음을 지니면 중생을 구도할 효과를 저하시키고 심지어 사악에게 틈을 타게 된다. 부동한 박해환경 속에서 생사를 내려놓음을 체현할 수 있다.

일부 수련생은 대량으로 세인을 구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아주 정진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납치된 후 사오하고 전향하여 심지어 반면으로 나아갔다. 바로 수련 중에 감추어진 집착때문에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집착함을 분명히 알면서 포기하지 않아 사악에 순종하고 소극적으로 감당하였던 것이다. 사실 생사를 내려놓지 못함이고 강력한 사람마음으로 자신을 대법 밖으로 간격시켜 속인과 혼동한 것이다. 만약 정말로 사부님과 법을 믿고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어 법 속에 용합시키고 시종 강대한 정념을 유지한다면 생사를 내려놓기 어렵지 않다.

사악은 사람을 박해하지 신을 박해하지 않는다. 생사를 내려놓음은 바로 사람마음을 내려놓음이다. 사람마음이 없으면 신이고 신은 생사의 개념이 없다. 마귀굴 속의 동수들이 박해당한 정도는 사람 마음의 적고 많음에 의해 결정된다. 일부 수련생은 사람마음이 적어 비록 뛰쳐나오지 못해도 사악은 또 방법이 없다. 사악은 우리에게 사람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고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념이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정념이 강하면 우주특성에 동화되는 부분이 많고 일정한 층차의 표준에 부합되었음을 설명한다. 위력은 흑수, 썩은 귀신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즉, 사악은 또 우리를 움직일수 있겠는가?

사람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은 수련의 과정이고 이 과정은 바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과정이다.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세가지 일을 잘하고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빠른 방식이며 또한 유일한 방법이다. 걸어 나오지 못하거나 혹은 사람마음을 지니고 세가지 일을 하면서 또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데 법리에 대해 인식이 분명치 못함이다. 미친듯한 박해 속에서 걸어 나오려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생사를 내려놓았는가 내려놓지 않았는가는 또 시시각각 자신에게 사람마음이 있는가를 찾아내야 한다. 무엇에 집착하는지, 혹은 사람의 관념에 덮어져 있는지, 일사일념, 일언일행이 법의 표준에 부합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찾아내어 제거해야 강대한 정념으로 충실할 수 있다. 이렇게 세인을 구도해야만 비로소 최고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고 동시에 또 가장 안전하다.

일부 수련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걸어나오면 사악은 우리를 박해하고 걸어 나오지 못하면 또 세가지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우리를 마귀굴로 모는 것이 아닌가?” 이는 사람마음으로 법을 가늠한 것이고 법에 입각하여 법을 인식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속인의 마음을 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것은 진정으로 속인을 초월한 데로 향해 나아가는 반드시 넘겨야 할 고비이다. 진수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넘겨야 하는 것으로 이것은 수련자와 속인의 계선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걸어 나와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 사람은 법을 실증하고 세인을 구도할 수 있는가? 오로지 신(神)만이 자격이 있다. 세가지 일을 잘하면 낡은 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하고 사람과 결렬할 수 있고 사부님을 따라 갈 수 있다. 그리고 또 일부분 사오자들은 법실증을 구실로 삼아, 사람마음을 덮어 감추는데 전향하면 걸어 나온 후 진상 알림을 하기 편하다고 한다.

사실 사악은 오로지 사람의 일면을 박해할 수 있고 그것들은 오로지 사람을 해치는 일만 한다. 만약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과정 중에 사람마음을 제거한다면 사악은 또 무엇을 박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의 정념을 펼쳐 보이는데 사악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무엇을 이룸에 있어 어떠한 사람마음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사악의 박해를 대단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낡은 세력은 실질상에서 바로 정법 중에서 대법제자가 능히 걸어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와 시시각각 당신들을 동반하는 거대한 관(關), 거대한 난(難)을 겨냥한 것이다.’ (《청성(淸醒)》) 사악의 박해 역시 우리 수련과정 중의 일종의 마의 교란에 불과하다. 우리가 심성을 제고하고 생사를 내려놓기만 하면 이 고비는 쉽게 넘을 수 있다.

문장완성: 2006년 01월03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4/1179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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