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후난(湖南) 팔순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2월 11일] 수련 체험을 써 내려가면서 나자신에게 환희심, 현시심이 매우 돌출함을 발견했다. 나는 수련한지 8년이 되었으나 병을 치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법공부를 참답게 하지 못했다. 사실 법을 잘 학습할 수도 없었다. 을 읽을 때면 어구의 뜻은 다 아는 것 같았지만 그 내포를 보아 낼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또 어떻게 법리상에서 인식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사부님께서 각지에서 하신 설법을 많이 보려고 했으나 을 많이 읽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른 동수들은 전체를 다 암송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논어’밖에 암송하지 못했다. 늘 기억력이 차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심지어 갓 입학한 초등학생도 아닌데 암송은 왜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법 암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의 내용은 다 아는 것 같았지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체적인 어구를 찾으려면 곧바로 찾아 내지 못하였다. 원인은 바로 진정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사람의 마음으로 대법을 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련에서 나는 초등학생보다도 못했다. 사악한 당문화의 세뇌 하에 무신론의 독해로 인해 수련하겠다는 생각을 종래로 해보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부처를 믿었는데 어머니의 고향 쥬강산 (九崗山)에 가서 선조들에게 향을 피우면서 아들, 딸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를 했다. 나는 이것은 다만 어머니의 소원일 뿐 아무런 작용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시아버지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기독교 목사였다. 내가 남편과 약혼할 때 시아버지는 아무런 요구도 하시지 않고 다만 한마디 말씀만 하셨다. – “너희들이 장래 기독교 가정을 건립하기를 바란다.” 그 해 남편은 교회당으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내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누구를 향하여 기도하는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 않은가! 남편 역시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후에는 그가 혼자서 예배하러 가곤 하다가 공산 악당의 무신론의 영향 하에 그 역시 더 이상은 믿지 않게 되었다. 1990년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나의 세 아들이 모두 어머니의 꿈을 꾸었는데 확실히 그러한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는바 이 역시 내가 수련의 길을 걷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97년 8월 (음력으로는 7월)에 나는 법을 얻었지만 내가 수련하려는 목적은 매우 불순했다. 첫째는 병치료였고 둘째는 신체를 전화시켜 승천하는 것이었는데 완전히 사심을 바탕으로 한, 일체가 개인을 위해서 였다. 법을 배우기 전에는 백일비승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는데 법을 얻어 이 말을 듣게 되니 마음 속으로 백일비승은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시작에는 법공부, 연공에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 가부좌도 진보가 매우 빨랐는데 점차적으로 반시간씩 틀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기만 하면 참지 못하고 손으로 여기 저기 만지작거리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있다.) 그처럼 작은 고통도 당해내지 못하면서 수불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망상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씬씽(心性)이란 무엇인가? 씬씽(心性)은 더(德)[더(德)은 일종 물질이다.]를 포괄하고, 참음(忍)을 포괄하며, 깨달음(悟)을 포괄하고, 버림(捨)을 포괄하는데 속인 중의 각종 욕망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며, 또한 능히 고생을 겪을 수 있는 등등 허다한 방면의 것을 포괄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자신이 참는 방면에서는 조금 진보가 있는 것 같고 버림도 돈과 재부 방면에선 전에 비해 담담하게 볼 수 있으며 기타 문제에 부딪쳐도 나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독 아픔을 두려워 하는 것을 개변하지 못했다. 사실 이것은 백일비승의 집착으로 조성된 것이며 구하려는 마음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구하지 않으면 저절로 얻게 되며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님께 달렸다.” 라고 하셨다. 구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하여 내 다리는 점점 더 아팠고 아플수록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랐다. 이렇게 되자 비관적인 정서가 나타나면서 자신이 수련할 수 없지 않는가 하고 걱정했다. 이러한 생각이 좋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바로 잡지 못했다. 이것 역시 지금 내 앞에 놓여져 있는 고비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매우 중하여 걸어나감이 비교적 적었다. 다만 외출할 때 적당한 장소에서 진상을 알렸는데, 예를 들면 택시에서는 운전기사에게, 남편을 병원에 데리고 갈 때면 기타 환자들에게, 채소나 물건을 살 때 기회를 이용하는 등등 기회를 찾아 진상을 알렸다. 그리고 집에 초대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진상을 알렸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친구, 동사자, 동학, 친척들이 매우 많다.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할 때, 친구들이 모일 때, 친척집에 놀러 갈 때에 직접 마주하고 진상을 알릴 수 있으면 자료를 보내고 비디오를 돌릴 수 있는 바 자연스럽게 진상을 알릴 수 있어 효과가 비교적 좋았다. 또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진상 자료를 다른 친구와 친척들에게 전할 수 있으며 고향에도 보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 해야 한다.’ 에서 말씀하셨다. – “기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과거의 수련인은 일상을 다 소모해야만 비로소 끝까지 걸을 수 있는 길에서 감히 한 시각도 태만하지 못했다. 대법이 구도한 생명의 과위를 성취하는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서 또 가장 편리한 수련 법문이 있는데 이런 법을 실증하는 수련의 가장 위대한 영예가 일순간에 지나가는 짧은 수련 시간 내에 어찌 더욱 정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이 경문의 마지막 부분에 또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 “나는 당신들이 명백해진 후에 재빨리 따라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들이 능히 이 가장 위대한 신의 길에서 재빨리 따라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들이 능히 이 가장 위대한 신의 길에서 굽은 길을 적게 걷고 자신의 장래에 유감을 남기지 않으며 층차의 거리를 벌어지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나와 당신들 내지 당신들을 기대하는 중생들의 바람(願望)이다.”
사부님의 자비에 감사 드린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 중의 한 사람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의 두 아들이 나를 위해 컴퓨터를 수리하게 했고 작은 칠판까지 사다 주어 내가 글을 쓰게끔 점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을 수 있어 자신을 참답게 청리 할 수 있었다.
후회는 소용이 없다. 앞으로 법공부를 다그치고 배로 정진하겠다. 이렇게 하여 자신에게 유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한다.
층차의 제한이 있으니 동수들이 자비롭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 2005년 12월 9일
문장발표 : 2005년 12월 11일
문장갱신 : 2005년 12월 11일 00: 00: 19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12/20/1169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