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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본집착

글/허난 대법제자

【명혜망】사부님께서는 경문 《원만을 향해 나가다》 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모두 법에서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한 면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대법의 법리를 보았고, 또 많은 수련생은 사람의 관념으로 대법에서 같지 않은 인생 동경과 소원을 찾았다. 바로 이런 사람 마음의 집착에 사로잡혀 대법수련 중에로 들어왔다.” “ 어떤 사람은 대법이 자신의 과학적인 관념에 부합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도리에 부합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정치에 대한 불만에 부합되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이 부패된 인류의 도덕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과 사부님은 바르다(正派)고 여기고 있는 등등등등이다.”

자신이 입문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필경 어떤 심태로 대법에 들어 오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몇몇 부류의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내가 능히 대법에 들어 오게 된 것은 정말로 대법의 법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매우 다행으로 생각했으며 근본집착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은근히 기뻐했으며 자신이 오성이 좋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 몇 년간 “근본집착”이란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줄곧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이런 것을 수련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법노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에 와서 나는 시간의 긴박함을 느꼈으며 갑자기 “근본집착”에 대해 생각이 났다. 내가 정말 근본집착이 없는가? 당초에 어떻게 대법에 들어 왔는가? 《전법륜》을 보고나서 이것은 사람을 제도하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나는 속인의 그러한 무엇을 향하는 염원을 품고서 들어 오지 않았는가? 정법제자의 심태로 속인 사회와 인류 역사에서의 수련 현상을 냉정하게 보게되자 나는 무언가 마치 서서히 열리는것만 같았다. 나는 자신의 수련과정을 다시 심사해 보기 시작했으며 지나온 길을 반성해 보았다.

“내가 어떻게 대법수련으로 들어오게 되었던가?”를 돌이켜 생각하자 마음속에 마치 안개가 서서히 벗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사색해 보았다. 그래 나는 확실히 파룬궁은 불법수련이라는 것을 알고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수련”이란 두 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나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당 문화 아래에서 자란 나는 중이나 비구니가 어째서 출가했으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정말로 몰랐다. 나는 그들이 가능하게 생활의 타격과 고난을 못이겨 인생을 회피하기 위해 그런 길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방식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마음을 상상할 수가 없었으며, 필경 어떠한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천륜지락을 포기하게 했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불학에 관계되는 서적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에야 나는 중이나 비구니들이 출가하게 된 것은 인과 관계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도 출가하여 불법수련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하여 고통을 느끼기 까지 했다

전법륜을 보고나서야 이것이 수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정말로 부처가 내려와서 사람을 구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인들 속에서 수련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자 하던 매우 흡족하게 생각한 생명의 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사람은 반본귀진하려 하며 이것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진정한 목적이다.”(전법륜)나는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3계는 정법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말씀하셨으며 인류 역사의 수련 현상은 모두가 대법을 위해 문화를 다져 놓았고 대법을 위해 길을 닦아놓았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나는 점차 청성해 지기 시작했다.

나의 근본 집착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는 전통적인 불교에 의해 형성된 관념이 장애를 조성했으며, 이로 인해 진정으로 대법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착오적으로 우주의 대법을 일반적인 불법수련으로 여겼으며, 사악의 박해를 졸업 시험으로 생각했으며, 사악이 대법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이 넘겨야 할 관으로 인식했다. 어떤 동수들은 “안을 향해 찾는”것에서 극단으로 나가고 있으며, 우주 정법의 기점에 서서 대법을 박해하는 것은 낡은 세력의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두 번째는 내가 과거에 어째서 출가하려고 했는가? 윤회의 고통을 깨닫고 거기서 뛰쳐나오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고통을 두려워 하는 생각이며 고통에서 해탈하려는 마음이었다. 속인들은 고통을 당하려고 하지 않으며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데 나도 이런 마음이 아닌가! 단지 내가 그들보다 좀더 높이 서있을 뿐이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려고 하지 않고 속인중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틀리지 않으며, 사람이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법제자의 수련은 과거의 그렇게 간단한 수련이 아니며 과거의 수련은 개인의 원만과 3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대법제자의 수련은 아니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며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실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과거에는 당신이 속인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지를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좋다고 하든지 나를 나쁘다고 하든지, 그것은 모두 속인의 생각이며 수련인으로 말한다면 무관하다. 누가 당신 속인이 어떠한 지를 관계하겠는가? 수련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사람이 수련하여 원만 되면 가게 되는데 속인이 어찌하려면 어찌하도록 하라. 죄가 있으면 그 사람은 감당해야 하고 안 되면 역사의 도태에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과거에는 곧 이러하였다.”( 북아메리카 대호구 법회에서 하신 설법)

이것은 인류역사에서의 모든 수련의 근본이며, 이것은 낡은 우주의 위사(为私) 하는 근본이며, 이것은 바로 낡은 우주가 “멸망”을 향해 나가는 근본 원인이다. 정법수련에서 정념이 약해질 때 전통수련에서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관념들이 우리를 교란하게 된다. 이런 교란속에서 안을 향해 찾는다면 모두가 위사한 것이다. 마음을 닦고 자신을 찾는 것이 마치 마난에서 해탈하고 자신이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며, 근본상에서 대법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아니며 중생을 구도하려는 마음이 아니다!고통에서 해탈하려는 위사한 마음의 교란으로 하여 환경이 조금만 느슨해져 자신에게 박해가 미치지 않게 되면, 중생을 구도하고 세인들을 구도하는 사명을 늦추게 된다. 뿌리가 깊이 내린 고통에서 해탈하려는 전통수련의 관념에서 보게 되면, 마난중에서 고통속에서 안을 향해 찾는것도 피동적이며 교란을 받게 되거나 박해를 받게 되어서야 안을 향해 찾으며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안을 향해 찾는다……. “내가 오늘 좀 잘 했으니 마땅히 좀 좋아야 하는데, 내가 내일 좀더 잘 하면 마땅히 좀더 좋아야 하는데! 그는 언제나 이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데 보기엔 그래도 마치,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 보라고 하면서 놓는 것 같다. 당신이 잘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위해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가서 해야 할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대(大)뉴욕지역법회에서의 설법과 해법 )이런 위사한 요소는 자신의 정념이 부족할 때 개인의 수련과 제고를 첫자리에 놓으며 자신이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을 첫자리에 놓게 한다. 세인들이 독해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들이 도태되거나 말거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속에는 자신의 안위만 있으며 세인들이 구도되든가를 생각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 개인의 심성과 제고에 놓으며, 어떻게 세인들을 구하겠는가 하는데 놓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서 해탈하려는 이 한 근본집착의 표현이다.

이때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 어째서 새 설법을 보고나면 즉시 정념이 생기고 속인의 일에 부딪치면 금방 소실되는가 하는 것이다. 세인들이 구도될 것을 기다리고있으며 상황은 매우 긴박하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둔감해져 있는가? 사부님께서 조급해 하시고 중생들도 급해하고 있는데 나 자신은 도리어 급해하지 않고 있는가? 어째서 좌절당하면 소침해지고 포기하는가? 어째서 오랫동안 법을 실증하면서 피동적이며 내심에서 우러나와 하지 않고 있는가? 모두가 이런 자신을 해탈하려는 근본 집착이 장애를 조성하고 있으며 나로 하여금 중생을 구도하는 방향을 이탈하게 하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문장완성:2005년 12월 06일
문장분류 : [제자절차]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5/12/7/1160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