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국대법제자 쑹옌룽(宋彦龍)
【명혜망 2005년 11월 14일】
존경하는 사부님, 그리고 여러 동수님들 안녕하십니까?
인류의 도덕수준이 급속히 아래로 미끄럼질치고 있는 오늘, 우리 대법제자들이 꾸리는 매체는 마치 한 가닥의 맑은 물줄기(淸流)처럼 사람들의 사상을 바로잡고 있으며 새로운 문화를 다져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면에서 특유의 작용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매체활동에 참여하는 과정 중에서 얻은 약간의 수련체득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신문배포:
처음 신문배포에 참여하는 과정 중에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날 제가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그날 작업은 특별히 힘들어서 퇴근 후에도 온몸이 시큰거리고 아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빨리 휴식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서자 컴퓨터 옆에 놓여있는 2~30부의 신문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오늘도 나눠주지 않는다면 배포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신문이 곧 발간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휴식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이 신문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매 한 부의 신문에는 여러 동수들의 피나는 노력들과 아낌없는 경제적 도움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신문을 나눠주지 못한다면 대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어찌 우리들이 “마음을 써서” 하는 것을 체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신문을 처리할 것인가 역시 한 수련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다니는 행인도 드물었습니다. 저는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한집씩 신문을 배포했습니다. “중국요리집”, “중국식품점” 등 무릇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전부 들어가서 신문을 받을 수 있는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가게든 한곳에 많은 신문을 남겨주기는 아까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낭비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시간 넘게 걸어 다녀서야 비로소 몇 십 부의 신문을 다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는 놀랍도록 가벼워졌으며 매우 시원했는데 온몸의 통증이 전부 소실되어 있었습니다. 격동된 나머지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주신 고무격려와 깨우침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식품점 사장님의 감동
어느 한 번 저는 다른 두 명의 동수와 비를 맞으며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신문을 배포하러 갔습니다. 한 “중국식품점”에 도착했을 때 사장님이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는데 자신의 아내는 중국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파룬궁을 알고 있으며 또 우리 신문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감개무량해하면서 “당신들이 걷고 있는 길은 아주 고생스럽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이런 길을 선택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또 “우리 식품점을 찾아오는 중국인들이 아주 많은데 그 중에는 일부 중국 관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들을 잘 접대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들을 탐탁치 않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다릅니다. 나는 오늘 당신들을 잘 대접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제가 가장 우러러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식품점 사장님이 갑자기 한 이 말로부터 우리는 그의 명백한 일면은 대법제자들을 매우 존경하고 있으며 또한 진상을 알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萬古事, 爲法來(만고의 일은 법을 위해 온 것이거니)”(사부님의 경문《연극》), 오늘의 생명 중에 대법을 위하여 오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신문을 배포하는 동수들의 어깨 위에는 중생을 널리 구도하는 신성한 사명이 놓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문을 통하여 속인들은 보다 쉽게 순정(純正)한 문화에 접근할 수 있고 보다 쉽게 대법진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신문편집 중에서 동수들과의 협조
정법형세가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는 까닭에 신문의 내용배치와 판면 등 방면에 대한 요구도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문편집과정 중에서 때때로 기술적인 착오나 혹은 의견불일치 등의 일부 상황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만약 자비와 관용하는 마음으로 동수와 교류한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마땅히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나타날 때 저를 포함한 몇몇 편집인원들은 늘 원망하거나 질책하는 어투로 이야기하면서 책임을 다른 동수에게 미루거나 신문 디자인을 하는 동수에게 미루기만 했을 뿐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고려하지 못하였고 늘 다른 사람이 마음을 써서 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상대가 자신을 위해 이유를 찾아 해명할 때는 말도 하기 싫었으며 자신만 옳다고 여겼기에 아주 피로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동수들에게 조성하지 말아야할 심리적 부담도 일부 조성시켰으며 문제가 발생해도 상대와 교류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점차 간격이 생겼습니다.
저는 늘 어떻게 하면 우리 신문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항목에 참여하는 동수들과 협조를 잘 할 것인가, 조화롭지 못한 원인은 내가 그 중에서 좋지 않은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정말로 좋지 못한 작용을 일으켰고 이곳에 제가 필요하지 않다면 주동적으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수들이 잘 협조하여 공동으로 이 임무를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이것이야 말로 최종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집착을 찾아내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다른 활동에 참여한다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 매체 팀은 현재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데 어떻게 이 관건적인 시각에 탈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 자체는 바로 자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고 정체(整體)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하며 진정으로 안을 향해서 찾았을 때 우리의 전반 수련 과정 중에서 수련하는 것은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수련은 곧 마음을 향해 수련해야 하고, 안을 향해서 수련해야 하며,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바,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없다.”(《전법륜》)
문제가 나타났을 때 무엇 때문에 나의 첫 일념은 안을 향해서 찾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다른 동수에게로 미루는가? 설사 다른 동수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자비롭고 관용어린 마음으로 상대방과 교류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속인과 같은 원망하는 태도와 서로 책임을 미루는 마음은 결국 문제만 복잡하게 할 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아태지역 수련생회의에서의 설법》 중에서
“당신들은 수련 중에서 늘 다른 사람만 눈여겨볼 수 없다. 자신을 보고 자신을 수련시켜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보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부족함을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매 한 건의 일을 잘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는 과정 중에서 사상을 바로잡고 곤란 앞에서 대법제자의 정념정행(正念正行)을 체현해내는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대단한 것이다. 일개 대법제자로서 그것이야말로 정념으로 법을 실증하는 것이며 당신은 비로소 진정한 부끄러움 없는 대법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또 “곤란 앞에서 원망하지 말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도 하지 말라. 사부는 볼 수 있고 뭇 신들이 볼 수 있다. 잘 하였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영원한 위덕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설법 중에서 “안을 향하여 찾는다[向內找]”란 글귀가 바로 직지인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발생할 때 저의 첫 일념은 분명히 안을 향해서 찾는 것임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하려고하면 그토록 어려운지? 어떤 때는 동수들과도 선의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는데 이는 사실 내심으로 동수들에게 불평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을 향해 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줄곧 동수들의 집착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나 실제 수련 중에서 고통이 왔을 때, 모순이 심금을 충격할 때, 특히 일단 사람의 그 완고한 관념을 충격할 때면 여전히 관을 넘기가 아주 어려우며 심지어 고험(考驗)임을 뻔히 알면서도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다.”(《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어떠한 대법 활동에 참여하든,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든지 막론하고 순풍에 돛단 격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수련과정 중에 있고 고험 중에 있으며 또한 여러 방면에서 속인의 마음을 제거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이 나타나고 의견불일치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착심을 버림으로써 제고하여 올라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에 봉착했을 때 진정으로 안을 향해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할 수 있어야 수련이다”라는 말과 같으며 비로소 대법제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상태인 것입니다.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回天不是盼]
비록 우리 매체팀은 현재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나 대다수 동수들은 단일하게 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많은 대법 일을 감당하고 있기에 시간배치에서 늘 충돌이 발생합니다. 또 다른 일부 원인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우리 매체팀으로 하여금 장기간 주기적인 법공부 교류의 환경을 형성하지 못하게 했던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난번에 만들었던 신문에 존재했었던 문제점들이 다음 신문에도 중복하여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엔 저 역시 원망하는 태도로 문제를 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협조자는 주동적으로 우리를 조직하여 법공부 교류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는가? 문제가 발생하여 교류할 때면 관련 동수들이 다른 원인으로 인해 늘 교류회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장기간 이렇게 내려간다면 우리 매체는 어느 때에야 질적인 제고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또한 협조자에 대한 의견도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애만 태웠을 뿐 상대방과 교류하기는 싫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러한 저의 심태 역시 자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고 동수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 것이며 정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표현임을 발견하였습니다. 늘 자신이 협조자가 아니므로 지나치게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저의 엄중한 사적(私的)인 마음이 작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대법은 우리로 하여금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할 수 있는 정각(正覺)으로 수련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아태지역 수련생회의에서의 설법》중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서 당신들이 생각된 것, 본 것, 접촉한 것, 능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가서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자신의 길, 자신의 위덕을 세우는 것이다.”
기왕 제가 이미 생각할 수 있었고 인식할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가서 하지 않겠습니까? 협조자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마땅히 가급적 주동적으로 협조자를 도와 일부분을 담당해야 하며 주동적으로 가서 해야 할뿐만 아니라 협조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뉴욕 국제법회에서의 설법》중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법을 실증한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무어라고 말해도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자신을 실증하려는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동수들은 누구도 당신이 어떻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자 저는 몇몇 동수와 함께 정기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하여 법공부하고 교류하였습니다. 처음 몇 번은 늘 일부 동수들에게 전화하여 그들더러 참여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야 우리는 동수들이 교류에 참여하려하지 않거나 교류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오히려 우리이 줄곧 이러한 교류의 기제(機制)를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을 조직하여 법공부와 교류할 때 교란이 특히 컸습니다. 이 집의 컴퓨터가 고장나지 않으면 저 집의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하여 교류는 늘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는 우리는 매우 빠른 시일 내에 하나의 유력한 정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수들은 이미 각자 어깨에 짊어진 사명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아직도 한 단락의 간고한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회귀의 길은 기다린다거나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념정행으로서 개창(開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되돌아감은 바람이 아니어라”(2002년 《사부님의 새해인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발언고를 마무리한 이튿날 저녁 저는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꿈에 우리의 사무실은 도처에 잡초로 뒤덮여 있었지만 동수들은 그 잡초더미 위에서 자신들의 일에만 바삐 맴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잡초들을 제거하려고 나서자 동수들도 같이 거들기 시작했으며 함께 어수선하던 사무실을 정리하였습니다.
저는 이 꿈에서 깨닫기를, 대법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에 바삐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했을 때에는 우리 공간은 난잡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단지 정념이 없는 정황 하에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응하고자만 하였지 우리들이 전체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하며 우리 공동의 공간마당을 위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이러한 잡초들을 제거하고자 할 때 동수들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며 우리 내심의 집착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공간마당의 일체 교란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끝내 하나의 정체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이는 좋은 시작입니다.
사부님께서 《시카고시 설법》 중에서 “이 한 순간은 천금(千金)보다 값지며 만금(萬金)보다 값지다. 이 한 단락 길을 잘 걷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대단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부님과 함께 하고 법과 함께 하며 정법시기와 함께 한다는 이것은 대법제자의 얼마나 큰 영예입니까! 우리 함께 사존님께서 주신 위대하고도 성스러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소침한 상태를 떨쳐버리며 미래의 매 한 발자국을 잘 걸어 자신과 자신의 중생들에게 유감을 남기지 맙시다.
개인의 약간의 체득입니다. 적절치 못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께서 자비로서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5년 한국 부산법회 발언고)
문장완성 : 2005년 11월 13일
문장발표 : 2005년 11월 14일
문장갱신 : 2005년 11월 1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5/11/14/1145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