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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구도는 자신의 수련과 밀접히 연관된다

글/오스트레일리아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0월 1일]

존경하는 사존님, 여러 동수님들:

나는 시드니 파룬궁 수련생으로서 1998년 10월에 법을 얻었으며 올해까지 7년 가까이 대법 중에서 수련하였다. 수련하는 길에서 불법(佛法)에 진감할 때가 많았고, 또 고비를 넘길 때 가슴을 파고드는 뼈저린 고통이 있을 때도 많았다. 사존님의 자비로운 가호 하에 오늘에 까지 왔으며, 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와 대법의 무한함을 깊이 느끼고 있다. “수련은 자신에게 있고, 공은 사부에게 있다.”(《전법륜》) 나 자신의 깨달음이라면, 다만 나아가려는 마음만 있고 자신의 집착을 대면하고 포기할 용기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은 곧 대법의 세정 중에서 바로 잡히게 되며,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게 이롭게 되고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도다”에 이르게 된다 이다.

오늘 나는 자신이 가정에서 수련한 체득을 여러분들과 교류해 보고자 한다- 중생구도는 자신의 수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존께서는 설법 중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한 지역의 수련생이 잘 수련하면 그 지역의 법은 널리 전해 질 수 있고, 공부를 잘하기만 한다면 대학에 붙을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처음 한 마디 말씀에서 사존님께서 우리에게 개인 수련과 중생구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말씀하셨다고 이해한다. 두번째 말씀에선 우리에게 수련 중에서는 착실해야 하며 정성껏 노력하면 노력한 것만큼 수확이 있으며 지름길은 없다는 이치를 알려주셨다.

나 역시 수련하는 과정 중에 이러한 체득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수련을 잘하기만 하면, 만들어진 환경이 좋아지며 이익을 얻는 중생도 상대적으로 많게 된다. 그러나 잘 하지 못하였을 때는 진상을 아무리 알려도 듣는 사람이 없다. 더욱이 우리 신변에 있는 친인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의 대법에 대한 태도와 내가 말한 진상을 받아들이는 정황은 큰 면에서 볼 때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인상과 그 당시의 심태가 자비로웠는가에 관계가 컸다. 나의 남편의 변화에서 나는 아주 많은 체득을 경험했다.

나의 남편은 나의 옆에 안배해 놓은 항상 내 마음을 실험하는 시금석과 같다. 내가 수련해서부터 줄곧 지금까지 나에게 수련해 버려야 할 것이 있기만 하면 우선 표면적으로 그가 나에게 주는 일종 마난으로 연화되어 왔다. 나의 남편은 전통적인 종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대법을 확고히 수련하고, 종교를 떠나기 위해 남편의 집안과 교회의 크나 큰 압력을 받아왔다. 대법이 박해당한 후 사악의 날조와 선동으로 집안의 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때의 나날들은 지내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수련을 끝까지 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세인들에게 전면적으로 진상을 알린 후로 나의 남편은 나의 첫번째로 되는 진상을 알릴 대상이 되었다. 나는 남편한테서 진상 알리기를 연마해 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점차적으로 진상에 대해 명백해지면서 대법에 대해 정념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 그는 나의 진상 알리기의 살아있는 매스컴이 됐으며 훌륭한 조수가 되었다.

나의 남편은 아주 외성적인 유럽인이다. 그는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늘 인사를 하며, 더욱이 중국 마누라를 얻은 까닭에 중국사람과 인사하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그는 우리가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려야 할 목적을 안 이후로 그는 중국인과 더욱 주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중국인이신가요? 당신은 파룬궁을 들어본 적 있어요?” 누구를 만나든지 그는 늘 곧바로 단도직입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화제를 꺼내며 다시 화제를 나에게 넘겨 그들에게 자세한 진상을 알리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단순하고 관념이 없는 행위는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단점을 보게 하였다. 나는 속인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인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는데 마침 남편의 이런 외향적인 성격이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많은 중생들이 나의 부끄러워하는 마음 땜에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의 나가기만 하면, 길에서 중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만 하면 진상을 말하였다; 우리가 늘 가는 식당 몇 군데에선 우리의 이름을 “파룬궁”이라고 부른다. 허다한 사람들이 우리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가져간 자료를 통해 진상을 알았으며 한 식당에선 몇몇 사람이 연공을 배우려고 하였고 책도 보려고 하였다. 어느 한 사장은 또 대법을 자신의 어머니한테 소개하였다.

예전에 남편은 다리에 병이 있었는데 늘 치료해도 낫지를 않았으며 매 한 단락 시간마다 며칠씩 아프고 괴로워하였다. 그 후에 저도 모르게 병이 나았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은 잔업할 기회가 없었지만 사장은 늘 돈 벌 기회를 남편에게 주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는 모두 당신이 진상을 알린 덕분이에요.” 라고 말했다. 남편도 기뻐했다. 어느 한번 그는 쇼핑센터에 가서 한 중국사장한테 진상을 알리겠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생각 밖으로 거기에서 일하는 점원이 파룬궁에 대해 나쁜 말을 가득 늘여놓았던 것이다. 남편은 오늘 진상을 알린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내일 다시 가서 손실을 만회하라고 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가 정말로 가서 말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뜻밖에 이튿날 남편은 퇴근해서 나에게 다시 갔다왔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남편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하여 그에게 “당신은 지금 대법제자처럼 그렇게 용기가 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그의 모국어로 된 진상자료만 인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편 부모님이 계시는 우편함에 몰래 넣었다. 또 가만히 넣은 것은 그들이 우리가 넣은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며 부모님들이 관념을 갖지 않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진짜 지혜가 있다. 이튿날 남편의 부모님들이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나에게 달려 와서는 파룬궁 진상 자료를 읽어 봤다고 하였으며 피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기독교도보다 더 좋다고 하였다. 그들이 왜 자료를 가져 온 사람들이 그들이 쓰는 언어를 알까 라고 궁금해 하였다. 그들은 아마 현지 시정부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한 것이라 추측하였다. 우리 둘은 알고 있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이렇게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내가 집에서 진상 알리기 기초를 단단히 다진 것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남편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좋은 사람이며 그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 수련 중에서 나는 줄곧 가정을 진지하게 원융하였다. 남편의 사업이 분망함으로 모든 집안일 집 밖의 일은 기본상 내가 걱정해야만 했다. 집과 아이들은 늘 깨끗하게 거두었으며 아주 잘 돌보았다. 아이들의 학습과 교육도 나는 종래로 느슨히 한 적이 없었다. 큰 집과 작은 집에 모순이 있을 때도 나는 늘 넓은 도량으로 이것저것 세세하게 따지지 않았으며 또한 남편에게도 수련인이 보는 각도에서 문제를 보라고 인도하였다. 남편은 이 때문에 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마누라가 수양이 높으며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라며 자랑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아주 화목하다. 가끔 내가 특별히 바빠 가족을 많이 돌보지 못하게 되면 그는 당초처럼 그렇게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최대한 대법 일을 잘 안배하여 그들한테 최대한 영향이 가지 않게 하여 집안에 안정적인 생활환경이 있게 하였다.

“대법 수련생은 어디에 있던지 사람들은 모두 당신 이 사람이 너무 좋다고 말하게 되며, 이것은 최대한도로 속인사회의 형식에 부합되어 가서 수련하는데서 체현되어 나오는 상태이다. 만약 당신이 이 한 점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은 바로 나의 말대로 하지 못하는 것과 같게 되며 사부의 요구에 따라서 하지 못한 것과 같다.”(《오스트레일리아 법회에서의 설법》)
나는, 수련한다하여 생활상의 일을 홀시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우리 이 법문은 바로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 속인과 어울려서 수련하며 속인과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일종 관계이며 다른 점이란 바로 우리가 체현해낸 심성이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남편이 나를 존경하는 그러한 부분이 바로 그가 전에 나에게 시끄러움과 고비를 조성하였을 때 내가 굳게 지킨 원칙들이었다. 법은 표준이 있는 것이며 수련인은 오로지 법의 표준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걸어야 만이 진정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다. 나는 가정에서 착실하게 수련하는 중요성을 깊이 느꼈으며 확실히 자신이 잘 해야 만이 법이 널리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보게 되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에서 우리는 가족과 사회를 개변하고 있으며, 주위의 공간장을 개변하며 주위의 중생을 감화하고 있다.

그 밖에 우리 개인수련도 대법제자의 정체와 정체적인 응집력 문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하나의 정체(整體)로 되어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일치하게 협력한다면 법력(法力)이 대단히 클 수 있다” (《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 》)고 하셨다. 우리가 협력을 잘 못하여 중생 구도에 손실을 조성하면 기실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수련에 있다. 매번 내가 선념으로 수련생이 잘 되라고 생각할 때 수련생은 곧 더욱더 잘하게 되였으며 몸에서 반짝이는 빛들이 더욱더 찬란하게 드러났으며 그 다음 도리어 나에게 주는 도움이 되어 돌아오곤 하였다. 매번 이럴 때마다 나는 늘 대법의 위대함과 정법을 수련하는 영광스러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순간에 우리는 법에 동화되어 파괴될 수 없는 정체를 이루게 되며 대법과 갈라놓을 수 없는 일부분으로 된다. 나는 이런 정체의 감수가 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작은 단체의 단결과 같지 않음을 체험하였다. 누구를 더 좋아하고, 누구를 더 싫어한다든가 또 누구와 말이 잘 통하다가 아니다. 흔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자신이 느끼기엔 비교적 편안한 하나의 고정적인 작은 범위를 형성한 후 우리는 정체와 간격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이 길어지면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행동하고, 수구를 하지 않아, 자신의 마성을 기르기 아주 쉬어진다.

변하지 않는 눈길과 관념 역시 동수사이의 간격을 조성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중에서 우리에게: “이 한 쌍의 눈은 우리 현존 물질공간의 물건을 이런 상태로 고정시킬 수 있는 이것 외에 그것은 무슨 큰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반드시 진상이 아니라면 사물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또 기억 속의 자신이 본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나 자신의 관념과 업력은 나로 하여금 수련생을 오해하게 하고 또 무의식중에 일종의 내재적 소모를 형성하게 한다.

우리 지역의 동수들은 늘 이러한 문제를 토론하는 즉 왜 일부 국가의 수련생들은 그렇게 잘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정부는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과의 차이를 본 후 이 현황을 아주 개변하고 싶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내 생각엔 이 일체는 수련의 근본 문제로 되돌려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방법을 참조하거나 무슨 수법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 선생이 한 반의 학생을 가르칠 때 편애가 없이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을 듣고 안 듣고, 노력하고 노력 안 하고는 학생 개개인의 문제이다. 수년 후에 보게 되면 착실하게 공을 들인 학생은 더욱더 우수하고, 공을 들이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은 학생은 문제가 점점 많이 쌓이게 된다. 거리는 이렇게 멀어져 간다. 우리 지역이 만일 잘 못했다면 기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초를 틀어쥐지 못한 것임을 말하고 실수(實修)하지 않았고 세 가지 일을 착실히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상황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내가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일부 정체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해결할 방법을 못 찾게 되면 포기하곤 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는 일부 정체적으로 협력하는 장렬한 항목과 활동이 별로 성과가 없거나 사람을 구하는 효율이 크지 않을 때 정체 협력에 대한 실망감이 생기며 제 딴엔 실제적이라고 생각되는 작은 일을 찾아 하려고 하였다. 실은 나의 수련 중에 봉착한 문제를 피한 것이며 그것을 사고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때문에 오늘까지도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수련하는 과정 중에 나는 아주 신성하게 느껴지는 많은 시각들은 꼭 큰일을 할 때만이 아니었다. 어떤 때 발생한 일이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나의 심태가 법의 표준에 도달했고, 이러한 사소한 일을 수련으로 여기어 안으로 찾을 때 그러한 심령이 제고되는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 비교적 크고 비교적 관건적인 일에서 자신이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일하는 데에 치우쳐 개인 수련을 홀시 했을 때 그 일이 표면상에 얼마나 신성하게 보이던지를 막론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대법 중에서 수련하는 것 같고, 대법일도 하고 있으며 또 많이 착실하게 한다고 하여도 실은 “어리석게 미혹되어 서쪽 하늘 가는 길 망상하나 밤길에 갈팡질팡 달을 건지네” (《유위》) 인 격이다. 나는 많은 시기의 신성함은 이런 정법홍세가 가져온 신성함이며 몸을 그 속에 담고 참여하였을 때의 그런 신성함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기실은 법의 신성함이었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고험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초월하고, 자신의 후천적인 관념을 이겨내며 이 물질공간 육신의 지배를 당하지 않았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자아 형상을 가진 공을 수련해 낼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으로 수련 중의 신성함을 체득할 수 있다.

우리 대법제자들은 정법형세에 협력하여 인간세상에서 일부 조직의 정체적인 대형 진상활동을 조직하여 확실히 넓은 범위내에서 사회와 매스컴의 호응을 가져 왔으며 이로 인하여 정법 홍세가 인간세상에서의 체현을 강화하였다. 이는 대법제자가 정법노정을 따라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빠질 수 없는 한 방면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대법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박게 하고 착실하게 세인을 구도할 수 있는 목적에 도달하게 하려면 이러한 노정을 따라가는 넓은 범위의 활동 외에 우리 매 대법제자마다 일상 생활속에서 바른 몸가짐으로 진선인에 동화하며, 법의 부동한 층차에서의 우리에 대한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사에 있든지, 가정, 또는 사회에 있든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우리의 순정한 에너지 마당으로 인해 순수한 선량한 행위를 하게 되며 대법에 대해 정념이 생기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참가한 활동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대법제자의 마음 상태로 대법일을 하지 않고 만일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했다면 허다한 일들은 생각했던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 많은 활동을 만일 우리가 표면상의 참여에만 중시하고, 오히려 진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자비심이 결핍하고, 안일을 구하는 마음과 의지심으로 말미암아 일부 착실하고도 간고한 수련과정을 피한다면 어떤 활동은 마지막엔 자신을 위해 하는 식으로 변하게 되며 얻은 것이란 다만 표면상에서 마음이 편함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계속 말해도 일체는 수련의 근본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최근에 나의 부친한테 진상을 한 경력은 나로 하여금 수련은 진짜 허풍치는 것이 아니고, 형식만 갖추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미리 준비한다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수련은 바로 착실하게 한 걸음 한 발작이다. 오로지 법공부를 잘하고, 안으로 찾으며 자신을 개변할 용기를 가져야 만이 비로소 제고해 올라갈 수 있다. 내가 겉으로 얼마나 잘한다고 표현하든지 간에, 길거리에서 진상을 할 때 낯선 사람에 대해 얼마나 잘 용인한다고 표현하든지 간에, 나의 체험담 발표가 얼마나 격앙되었다든지 간에 모두 나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표면상에서 법의 표준에 도달한 것이다. 만일 내가 결함이 있는 가족들에 대해 자비롭지 못하고, 아직도 집착이 있는 나의 동수에 대해 자비롭지 못하며, 진정으로 세인을 자비롭게 대하지 못한다면 그럼 나는 근본적으로 진정으로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번 법회의 교류를 통해 우리 오스트레일리아 대법제자들이 서로간의 관념을 버리고, 정체를 형성하여 상호 도와줌으로써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 부축하며, 정진 실수하며 공동으로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홍음》중의 《실수》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5년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발언고)

문장완성: 2005년 09월 30일
문장발표: 2005년 10월 01일
문장갱신: 2005년 10월 02일 22:05:10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0/1/1115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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