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며칠 전에 잘 알고 지내던 한 수련생을 만나러 갔다. 그는 예전에는 비교적 정진하는 편이었지만 1999년 7.20 이후부터 이미 수련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대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이미 아주 멀어져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수련의 기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고집스런 관념을 품고 사부님을 대하고 대법을 대한 것이었다. 그를 통해 나는 낡은 우주 중의 생명이 자신의 관념은 내려놓지 않으면서 대법을 대하는 그런 고집스런 관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만약 한 생명이 능히 진정으로 중대한 문제에 관련하여 어떠한 관념을 갖지 않고 문제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자신을 주재할 수 있다. 이런 명석함은 지혜이지 일반인의 이른바 총명과는 다르다.”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낡은 우주가 곧 해체될 때 그 중의 한 생명으로서 어떠한 관념을 지니지 않고 대법에 동화할 수 있는가는 새로운 우주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관건으로 되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들은 후 나는 전반 우주가 일찍이 우주의 특성을 이탈하였고 중생의 수많은 관념들이 모두 변이가 발생하였음을 알았다. 층층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세간에서는 또 여러 차례의 윤회를 하며 나중에 또 사악한 당문화의 장기적인 세뇌를 받았다. 한 수련자로서 수련의 길에 들어와서 만약 정확한 기점이 없거나 혹은 수련 중에서 계속 청성하게 자신의 수련 기점을 바로 잡지 않는다면 이번 마난을 지나 오늘날까지 걸어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다.
오로지 진정으로 법에 용해되어 법에 동화해야만 비로소 후천적의 각종 각양의 관념을 바로 잡고, 심지어 생명이 산생될 때 존재했던 사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불순한 요소를 바로 잡아 진정으로 법 속에 있는 하나의 입자가 될 수 있다. 오로지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점차적으로 자신의 후천적인 각종 변이된 관념을 똑똑히 보고 내심으로 대법의 비할바 없는 순정함과 훌륭함, 위대함을 진정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끊임없이 양성 순환하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한차례 실수(實修)과정이다. 오로지 사부님을 바싹 따르고 대법의 노정을 바싹 따라야만 비로소 한걸음 한걸음 실수(實修) 속에서 목격할 수 있으며 비로소 각종 각양의 마난을 타파하고 층층의 변이된 관념을 타파하여 진정으로 훌륭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계속 수련의 기점을 바로 잡지 못하면 진정으로 법에 용해될 수 없는데, 그것은 법은 그 법리를 동기가 순정치 못하거나 혹은 기점이 순정치 못한 수련자에게 펼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계속 진정으로 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후천의 각종 관념과 집착 앞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각종 각양의 변이된 관념에 의해 미혹된다 .
사부님께서는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한 것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제거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그가 내심에서 아직도 법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그럼 이번 마난 속에서 필연적으로 동요되고 미혹될 것이며 나중에는 대법에서 이탈할 것이다. 바로 자신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에 여태껏 수련의 기점을 바로 잡지 못하며, 자신을 가로막고, 자신으로 하여금 법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대법에서 갈수록 멀어지게 한다.
99년 이전 법공부에 비교적 일찍이 참석했던 한 젊은 수련생은 상당히 오랫동안 법을 배운 후 어느 한차례의 법공부가 끝난 후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법인가? 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랫동안 법을 배운 그가 어찌 아직까지 이 문제를 물을 수 있는가. 나는 또 어느 한 나이가 좀 많은 한 수련생이 법을 배운 뒤 얼마되지 않아 그가 내심에서 “원래 우주에는 법이 있었구나!”고 놀라서 감탄하는 것을 들었다. 후에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매 사람마다 더욱이 갓수련한 사람의 법에 대한 인식이 사실 아주 크게 차이가 나지만 법공부는 표면의 형식을 표현하지 않았고 또한 매일 법공부 시간의 길고 짧음 혹은 수련 시간의 길고 짧음에서 표현되지 않고 관건은 내심에서 진정으로 법을 인식하였는지 인식하지 않았는가 이다. 나는 줄곧 닫혀서 수련하는 사람이다. 이전에 아주 일찍이 천목이 열려 수련 중에서 다른 공간의 아주 많은 훌륭한 정경을 볼수 있던 이 수련생들이 마난 속에서는 오히려 수련을 하지 않고, 심지어 반면으로 나아간 것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미묘한 것까지 모두 보고서 어찌 또 수련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 단호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번 마난을 겪은 후 정면과 반면의 예를 보고서 나는 더욱 청성하게 수련하는 기점의 중요성과 수련의 엄숙성을 알게 되었다. 만약 내심에서 법에 대한 인식에 견실한 기초가 없다면 낡은 세력의 이런 파괴성적인 고험 앞에서 아주 쉽게 법에 대한 올바른 믿음(正信)을 잃게 되기 쉽다. 일단 올바른 믿음을 잃게 되면 그럼 심성을 내려가고 심성이 내려가면 일체 체험, 상태도 모두 떨어져, 시초에 수련을 통하여 심성이 승화된 후의 심경 심태, 본체가 개변된 후의 온 몸의 홀가분한 상태를 모두 잃게 된다. 그럼 아무 것도 체험할 수 없고 심지어 그런 수련의 아름다운 상태도 기억 속에서 모두 사라지는데 그 공능, 다른 공간의 미묘한 정경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일체가 모두 아주 가물가물해 지고 멀어진다. 유독 내심에서 법리에 대한 심각한 이해가 더 나아가서 형성한 법에 대한 단호함,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함이오, 반석과 같은 단호함이다. 또한 가장 진실하고 믿을만한 것이기에 각종 고험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법을 인식해야 법의 비할바 없는 홍대함, 법의 불가능함이 없음(無所不能)을 체험할 수 있다. 바로 법이 한 개 입자로서 법의 끝없는 위력을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가장 관건적인 것이다.
층차의 제한으로 동수들이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2005년 09월 20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9/21/1108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