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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다른 수련인의 집착을 보았을 때

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8월 18일]
 
나의 개인수련 중에 구체적인 모순을 처리할 때, 나에게 매우 위험한 상태가 전 한시기동안 나타났다. 그렇게 두 달을 겪은 뒤에서야 나는 그 속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다. 이번의 경험으로 인하여 부동한 층차의 수련인은 부동한 집착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선의적으로 그에게 지적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개변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어떤 때에는 자신의 집착심을 분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렇게 집착하는 명목으로, 출발점은 그 사람을 위한다는 구실이다. 만약 속인이라면, 나는 가히 참을 수 있는데, 그러나 그 사람은 수련인인데, 어찌 저렇게 저급적인 잘못을 저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 사람을 도와 지적을 해 주었는데도 왜 고치지 않는가? 그는 반복적으로 내 앞에서 잘못을 저지르는데, 나는 하는 수 없이 반복적으로 말하게 되어 대량의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내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에조차 영향을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바로 나자신을 공제못하고 그를 질책했다. 이유는 수련인은 수련인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구실이었다. 만약 그가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곧 그와 왕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조폭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내가 쓰는 단어도 모두 높은데서 아래로 향해 풍자하고 조소하는 말들이었다. 내가 화내는 이유는 당신이 나의 수련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이 나의 좋지 못한 상태를 지적해 주었을 때, 나도 스스로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조절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오직 법공부를 하는 것만이 이런 좋지 못한 상태에서 걸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사부님의 《2003년 정월 대보름 법회에서의 설법》을 읽었을 때,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당신들은 아는가? 오직 이 하나의 수련의 문제를 말하더라도 우주의 낮은 층에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고층차에 이르면 간단한 것으로 수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업력을 없애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더욱 높은 층에서 이야기한다면 일체 번거로움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를 읽었다. 여기까지 읽자 나는 온몸이 이로 하여 진감을 느꼈다.

현재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만들어준 번거로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상한 것이면 나는 곧 괴로워하고, 화를 낸다. 그러나 “일체 번거로움은 오직 하늘로 돌아가는 길에 깔아놓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의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 여기까지 이 몇 개만 모자라는데, 번거로움은 곧 나의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닌가? 그리고 번거로움도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있단 말인가?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의 번거로움도 내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단 말인가? 내가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선택해주신 것이 아니란 말인가? 번거로움이 아무리 이상하고, 아무리 생각밖이고, 어떻게 사람을 괴롭히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내가 하늘로 올라갈 때 꼭 있어야 할 단계이며,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 번거로움을 미워하면, 내가 곧 이 몇 개의 계단을 싫어하면서도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오직 두가지 결과 밖에 없다. 하나는 영원히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계단이 없다면 앞으로 갈 수 없으며, 조급해지기 마련이고, 조급해지면 발을 잘 못 디디고, 바닥까지 떨어진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서, 나는 사부님께서 법으로 나를 점화해 주시고, 나를 제고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 더 큰 모순이 나타나도, 나의 관점과 인식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직 거리가 멀지만, 하나의 법에 용해하는 마음은 시시각각 번거로움이 나타나는 것에 준비하는 것이며, 즉 시시각각 번거로움을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전화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인데,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은, 자꾸 수련인의 결점을 보기싫어 한다면 바로 자신의 강렬한 집착을 체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고, 보기 싫어한다면, 바로 사람의 정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도 모두 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과 사람의 구별점은, 바로 신은 법리로 일을 처리하고, 어떠한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수련인의 결점을 보고도 지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선명한 결점을 보고도 지적해 주지 않는 것은, 대법제자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적할 때의 심태는 아마 여러 가지일 것이다. 어떤 때에는 아마 내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자비지만, 어떤 때에는 아마 과시심도 있을 것이고, 특히 다른 사람의 단점이 자신의 장점일 때에, 그런 하나의 마음이 있다. 이 한 점은 매개 제자가 아마 모두 있을 것이고, 단지 그 정도가 틀릴 뿐이다. 다른 한 방면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한 후, 다른 사람이 자꾸 고치지 않는다면, 자꾸 고민하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 역시 집착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기 운명이 있듯이, 수련인의 길도 다른 수련인에 의하여 개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량으로 세인을 구도하는 동시에, 개인의 착실한 수련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며, 안으로 자신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문장완성: 2005년 8월 16일
문장발표: 2005년 8월 18일
문장갱신: 2005년 8월 17일 23 : 07 : 50
문장분류:[제자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8/18/108612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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