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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의 논리”에 대해 논하다

글 / 랴오 란

[명혜망]
우리는 진상자료에서, 종종 “강도의 논리”를 설명해줄 때 다음과 비슷한 이야기를 이용한다. 예를 들면, 강도가 돈이 있는 사람을 강탈했을 때, 중국에서는 종종 사람들이 강도를 비난하는 대신에 돈을 잘 간수하지 않은 희생자를 질책한다. 다른 예를 들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했을 때, 사람들이 강간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희생자를 동정하는 일은 아주 희귀하다. 대신에, 그들은 보통 그녀의 덕행을 의심하든지 비판한다. 즉 “그녀가 무엇인가 그렇게 하도록 끌어당겼음에 틀림이 없다”거나 “일이 끝난 후 누가 그녀한테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는가.”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이러한 냉정한 비판들이 “강도의 논리”를 설명해준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악인들이 우리를 박해하고 있지만, 중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곤경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파룬궁 청원을 위해 그들이 중난하이 (중국 정부청사가 있는) 근처에 있는 국가청원위원회 사무소로 간 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가 파룬궁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는데도 당신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겠다고 주장한다면 당신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다”와 같은 정당한 근거가 없는 판단을 내린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중국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오랫동안 “강도의 논리”에 무기력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정기간 동안, 파룬궁 수련생들은 전체적으로 같은 정신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 수련생이 박해로 고통 받았을 때, 다른 수련생들은 가해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의 첫 반응은 박해 받는 동수에게서 보았던 여러 집착들과 부적합한 것들에 대해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동수들이 취한 첫 행동은 수련생을 박해한 악인들을 조정했던 다른 공간의 마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들은 박해받는 수련생에게로 손가락질을 했다. 이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우리가 “강도의 논리”를 채용한다면 우리는 다른 공간의 마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그런 비뚤어진 논리가 우리의 철학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글자그대로 우리의 수련생을 박해한 악마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변호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악한 논리는 하나의 실체로서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교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날까지도, 일부 수련생들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강도의 논리”를 끌어안고 있다.

사부님께서 《역시 방할하노라》에서 말씀하셨다,

“수련하는 사람은 수련하는 신이 아니므로 수련과정 중에 누구든지 잘못이 있기 마련이지만 관건은 어떻게 대하는 가이다.”

종종 다른 공간에 있는 사악한 생명들이 한 동수의 집착을 착취했을 때, 우리는 비평하고, 비난하며, 잘못한 것을 짓궂게 되풀이하여 말하고, 생색을 부리면서 말하거나 그를 멸시하기까지 한다. 우리 모두가 수련하는 인간들이며 수련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동수들이나 어느 다른 사람을 무정하게 취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선량함의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자비의 행위가 될 수 없다. 그가 제고하려고 하고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할 때 그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은 그처럼 귀중한 대망이다. 그가 어려움이나 고난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수련에서 특별히 도전적인 고험을 경험하게된다. 우리 모두에게 제거하지 못한 일부 집착심이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모두 사부님의 제자들이다. 우리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다른 동수들을 경멸하고, 깔보거나 비웃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을 제고하려는 그들의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을 계속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꺾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악마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동수들은 수련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1강의 “진정하게 고층차에로 사람을 이끌다”》에서 말씀하셨다,

“‘불성(佛性)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 누가 보든지 간에 모두 그를 도와주려 하며 무조건 그를 도와준다.”

법은 우리에게 사람들을 무조건 도와주기를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나의 말을 부디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가 동수들의 집착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요한 것은 좋은 의도를 갖는 것이다. 우리 함께 마음을 조용히 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한 수련생이 박해로 고통을 받을 때 만약 당신이 걱정스럽게 한 동수의 집착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무자비하게 비판을 한다면 분명히 당신의 정신상태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 당신은 첫 번째로 그의 집착을 비판하려는 데 대해 생각하는가? 또는 박해를 일으킨 다른 공간의 사악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가? 사악의 박해를 정당화하는 것과 결단력으로 사악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근원: http://www.pureinsight.org/pi/articles/2005/8/29/3278.html

발표일자: 2005년 9월 6일
원문일자: 2005년 9월 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5/8/24/33581.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9/6/646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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