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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하고 착실하게 자기 마음을 닦자

글/요연(了然)

【명혜망 2005년 9월 6일】

지나온 길을 돌이켜볼 때 내가 가장 깊고 절실하게 느낀 체득은 바로 착실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는데 수련 초기에 나는 매번 『전법륜』을 볼 때마다 비록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지만 매번마다 동일한 한 구절이 아주 깊고 중(重)하게 내 마음에 촉동(觸動)을 일으켰다.

“이 학습반에서도 현재 자신이 괜찮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그 말하는 태도마저 다르다.”(한글판 329쪽)

몇 년 동안 사부님의 이 구절은 늘 뇌리에 맴돌면서 늘 내게 경고해주었다. 지금 나는 이런 염두(念頭)는 바로 사오(邪悟)의 시작이며 자심생마의 첫걸음임을 심각하게 체득하게 되었다.

다행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는 걸어왔다. 나는 부동(不同)한 정도의 사오를 산생한 적이 있었지만 사부님의 자비하신 가호(呵護)하에 매번 회귀의 발걸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도대체 수련하는 사람이 마땅히 함께 교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한 번 청성해졌다.

수련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모두 깨달음을 말한다. “그의 오성이 좋다.”, “나는 오성이 좋지 않다.”, “나는 정말로 깨달았다.” 등등인데,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 수련인의 오성이 좋고 나쁨은 어떻게 가늠하는가? 누구의 말재간이 좋은지 보는 것인가? 누가 신기한 것을 말하는지 보는 것인가? 누구의 두뇌 회전이 빨라서 ‘수수께끼를 풀듯이’ 연상할 수 있는가 보는 것인가? 이런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중에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리키는 진정한 깨달음은 바로 우리가 연공과정 중에 사부가 이야기한 법(法)이자, 도가의 사부가 이야기한 도(道)인즉, 수련과정 중에서 자신이 마주친 마난(磨難)에서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수련과정 중에서 이 법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한글판 502쪽)

무엇을 깨닫는가?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식이 거의 없는 어떤 노년 수련생은 일련의 사람의 ‘이치’가 없으며 ‘믿음’만이 있는데 바로 사부님을 믿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오(邪悟)한 자들이 그를 전화시키려고 왔다가 모두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그는 “오성이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감히 더 이상 전화(轉化)시키지 못했다. 내 기억에 그 문장에서는 사악이 전화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법리가 명석하고 정념이 아주 강한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교양이 전혀없어서 무엇을 말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인데 그는 오로지 사부님만을 믿었기에 악인들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여기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교양없는 동수의 오성은 사실 정말 좋다는 점이다.

수련과정은 바로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집착을 내려놓고 씬씽(心性)을 제고하면 새로운 법리(法理)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깨달음이란, 수련생들이 인식하듯이 가서 무언가 더 높은 법리를 깨닫거나 가서 고심 끝에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수련중의 사람이 새로운 법리가 명백해졌다면, 그것은 당신이 수련 중에서 씬씽을 제고하고 층차를 제고하여 사부님의 법신께서 당신이 마땅히 알아야할 법리를 주신 것이다. 층층의 법리에 대한 깨달음은 구한다고 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수련인으로서 이 문제에서 청성(淸醒)한 인식을 유지해야한다. 일단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겨 “내가 얼마나 수련을 잘 했는지 보라.”, “나는 아주 잘 깨달았다.”라고 한다면 곧 위험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가 곤두박질친 후에 얻은 심득(心得)을 말하고자 한다.

정법수련 중에 나는 다른 동수들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미혹 속에서 헤매면서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동수들은 심지어 사부님의 법을 회의(懷疑)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로서 말한다면, 나는 사부님을 믿었지만 일부 법에 대해서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는 한 편 경문을 공부할 때 나는 늘 생각했다. ‘이 경문의 한 구절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니 자세히 보고 잘 깨달아야겠다.’ 이렇다면 점점 더 문제를 가지고 공부하게 되며 집착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어 점점 더 명백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문제를 점점 더 명백하게 하고자 할수록 점점 더 명백하지 못하게 되며 점점 더 많은 의문을 생기게 한다. 아주 슬픈 것은 개별적인 수련생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법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에 대한 믿음이 비교적 강했기에 사부님 말씀은 틀리지 않다는 이런 기점을 둘러싸고 사고하면서 억지 해석으로라도 동수의 곤혹스런 마음을 위로해주고자 했다. 그러나 도리어 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점차적으로 사부님을 굳게 믿는 내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으며 나의 그런 ‘의문들’도 법공부를 교란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사부님의 말씀은 옳으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이 문제를 내려놓고 상관하지 말자. 단지 법의 요구에 따라,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하자. 이렇게 내가 그 문제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무엇이든 명백히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역시 그 ‘문제’를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그 ‘문제’마저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후의 법공부 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체 문제에 대해 명백히 알게 되었다.

설령 내가 지금 자신의 인식을 말한다고 해도 마음속의 ‘의문’을 내려놓지 못하는 일부 수련생들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명백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늘 무엇이든 모두 명백히 알고자 하며 기어코 어떤 문제를 명백히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단지 명백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주 총명하다고 여겨 ‘문제’를 보게 되며 보다 많은 ‘문제’를 보게 된다.

한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위험한 것이다. 기실(其實)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우주의 진상(眞象)이다. 대법 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이 만약 정말로 자신을 내려놓고 사부님을 굳게 믿는다면 법은 우리를 도와 일체를 명백히 해주며 일체 가상을 꿰뚫어보게 할 수 있다.

개인의 약간의 체득을 써 내어 나와 같은 문제가 있는 동수들과 교류하여 공동으로 제고하고자 한다.

문장완성 : 2005년 9월 5일
문장발표 : 2005년 9월 6일
문장갱신 : 2005년 9월 5일 20:50:42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5/9/6/1098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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