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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롄에서 현재 정체적으로 법을 실증하고 있는 형세에 대한 반성(3)

【명혜망】(앞 문장에 이어서)

동수병:

본성의 일면에서、정체적으로 협조하는 측면에서 이 한 시기의 사악의 박해를 본다

ㅡㅡㅡ《최근 현지의 박해사례와 따롄제자들과의 교류》이 한 문장에 대한 보충

수련생이 7월 16일 명혜문장 《최근에 현지의 박해사례와 따롄제자들과의 교류》중에 따롄 지역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

1. 법공부와 심성수련을 늦추었으며 더욱이 색욕을 방임하고 질투심등 집착들이 사악으로 하여금 박해의 구실을 찾게 했다.

2. 동수들을 구출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부족하며 진상을 알리는 것이 확실하지 못하고 사악을 폭로하는 힘이 부족하다.

표현해낸 정체적인 상태는 법을 실증하는 많은 일들이 침체상태에 처해 있고, 정도 부동하게 마비되었거나 억제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마치 구체적인 일속에 바삐 돌아가거나 속인의 구체적인 일속에 빠져있는 느낌을 주며 또한 자기가 중요하다고 하는 일속에 분주히 보내고 있으면서 동수지간에 서로 협조하여 완성해야 할 일들을 못하고 있거나 잘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어떤 동수들은 속인의 집착 혹은 사악에 포위되어 걸어 나오지 못하며 더욱 심한 것은 신체가 사악의 엄중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사오하고 수련하지 않아 사악한테 이용당해 법을 교란하고 있다. 매우 많은 부정확한 상태와 정체상의 활기가 없는데 나는 응당 우리가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동수들이 엄중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이때 나는 아직도 개인수련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이 법을 실증하는 상태하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며, 나 자신 혹은 다른 동수들이 모두가 개인이 정진하지 못하여 이러한 엄중한 박해가 나타나게 했다고 여겼다. 사고하는 중에 나는 또 자기를 실증하는 심리 요소들을 섞어 넣었다. 나는 생각한다ㅡㅡ나는 정신을 차려야지, 속인들과 같으면 안 된다.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나는 승인하지 않으며, 발정념을 많이 해야지… 이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이로써 청성하게 깨어났는가? 좀 시간이 지나서 나는 자신이 별로 큰 변화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표면에서 조금 엄숙해지고 자신의 행위를 좀 단속한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정체 혹은 대부분 동수들이 그저 표면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수련과정에 있으면서 개인이 법을 실증하는 상태로서 이 모든 것을 대한다면 내가 보건대 이것은 근본상에서 정체적으로 진정하게 승화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때 마침 한 수련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당지의 일부 동수들이 사악의 교란과 박해를 받고 있는 구체적인 정황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정체적으로 이렇듯 엄중하게 억제를 받고 교란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 대해 나는 자신이 본성의 일면으로부터 나오는 각성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도법》중에서 말씀하시기를 “장기간 대법 중의 중생, 특히 제자는 법이 心性(씬씽)을 제고함에 대한 면에서 일종 부동한 층차의 오해가 줄곧 존재하고 있다. 매번 시달림(磨難)이 닥쳐올 때, 본성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서,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시달림(磨難) 속에 빠지게 한다.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으로, 법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으로, 인위적으로 당신들 신(神)의 일면을 억제시켰다. 다시 말하여 당신들이 이미 수련된 그 부분을 억제시켜 그들이 법을 바로 잡음을 저애하였다. 아직 수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시키며, 이미 법을 얻은 일면을 억제시킬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시켜 그로 하여금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 제자로서 시달림(磨難)이 올 때, 정말로 능히 탄연하게 움직이지 않거나 또는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 대한 부동한 요구에 부합되게끔 마음을 놓는다면, 족히 고비를 넘길 수 있다. 더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면, 만약 心性(씬씽) 또는 행위에 기타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꼭 사악한 마(魔)가 당신들이 방치한 틈을 탄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니다. 그럼 본성의 일면은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

“당신들도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 이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자연’이란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해석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럴 듯 하게 하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자연’이란 자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 일체 시달림(磨難)은 모두 필연적이고 바로 이러하다고 인정하므로, 일종 막무가내식의 소극적인 상태가 생기게 된다. 때문에 당신들 사람의 일면은 알아야 한다. 더욱 주요하게는 법을 얻은 그 일면이 똑똑하여야 한다.”

본성의 일면이 깨어나자 나는 근본상에서 정체적으로 매 하나의 사악의 교란과 내원 그리고 목적을 보게 되었으며 지금 사악이 매 한 동수에 대한 억제, 교란과 박해는 모두가 우리의 정체를 향해 왔다는 것과 우리 정체에 대한 교란과 박해이며 모두가 우리 정체에 대해 실시하고 있으며 단지 동수간의 상태가 다를 뿐이며 매 한 동수들에게 정도 부동하게 교란과 박해를 가져다 준 결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한다면 매 한 동수에게서 나타난 문제는 모두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개체의 문제가 아니며 표면적인 문제는 더욱 아니다. 하나의 각도에서 보면 대법제자의 정체와 정법을 교란하고 법을 파괴하는 사악한 세력의 정체지간에 미시적인데서 부터 표면에서의 겨룸이 매 한 동수의 개체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악이 어떠한 형식으로 교란하고 파괴하던지 간에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 누구이던지 막론하고 목적은 바로 정법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사부님을 도와서 중생을 구도하는 염원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로 말한다면 누가 박해를 받던지간을 막론하고 모두가 우리 자신이 박해를 받는 것이며 우리들의 정체가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며 모두가 우리 매 하나의 동수들의 생명의 근본을 향해 직접 충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명은 바로 대법이 직접 만든 것이며 동시에 또한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점을 보아내자 나는 내가 응당 무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렇게 완미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 대법제자들의 정체적인 지혜는 완미해질 것이며 설사 누락이 있고 표면적으로도 집착하는 것이 있고 또한 그것이 근본적인 집착이라고 할지라도 대법제자의 정체원융의 기제는 법의 체현이며 정체적 본질은 누락이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들이 서로 간에 협조를 잘하고 우리들의 정체적으로 완미한 법의 위력으로 하여금 저애가 없이 발휘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 사람표면에서 대법을 원융하는 한 가지 체현이라고 인식한다.

우리들이 수련생이 박해를 받는 것을 보았을 때 만약 아직도 개인수련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이 법을 실증하는 기점에서 보고 대한다면 사실 이것은 대법제자가 진정한 본성에서 나온 반응이 아니며, 수련인이 장기간에 형성된 수련 혹은 법을 실증하는 표면 관념의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그저 사람 일면의 속박을 가져올 뿐이며 정체적인 본질의 비약을 가져올 수 없다. 오직 대법제자의 진정한 본성의 일념만이 다른 공간으로부터 줄곧 표면에 이르기까지 바로잡을 수 있으며 정법과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내가 오늘 이야기 한 체험은 현재의 박해에 대해 단지 두개 측면에서 보는데 하나는 능히 본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체적인 협조이다.

정체적인 협조에 대해 말한다면 내가 보건대 우리 따롄의 제자들이 이 방면에서 뒤떨어졌고, 기타 지구의 동수들처럼 한 갈래의 견실한 길을 걷지 못했다. 게다가 사악의 표면상의 위협, 공갈, 간격, 파괴, 정체적으로 잘 협조하지 못한 것은 줄곧 정도 부동하게 정체적인 대법제자의 위력을 억제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사악이 틈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직 수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시키며, 이미 법을 얻은 일면을 억제시킬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시켜 그로 하여금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도법))나의 깨달음으로는 만약 우리의 정체가 잘 협조하지 못하게 되면 역시 대법제자의 정체적 위력을 억제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대법이 세간에서 위력의 체현을 억제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또 동수지간에 협조하지 않거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혹은 질투심으로 하여 간격을 조성하거나 혹은 늘 모순의 대치상태에 처해 있다면 이것이 대법을 상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법은 중생을 원용(圓容)시키고 있고 중생 역시 대법을 원용시키고 있다.” (《도법))나의 체험은 우리들의 정체가 협조를 잘한다면 바로 이 한 측면에서 법을 원융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가장 좋은 형식으로 법이 수요하는 것을 원융해야 한다.

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대법 제자가 서로 협조한다는 것의 내포는 단지 표면에서 서로 통하고 잘 배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법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중에서의 법의 요구이며 법의 특성의 체현이다. 이렇게 본다면 근본상에서 말할 때 협조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놓지 않은 데서 낡은 요소에 좌우지 당하여 나타난 원한다거나 혹은 원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다. 법에 서있지 않고 일하려는 마음, 공리심에 끌려 “원한다거나” 두려움 마음, 저절로 “원하지 않는다는” 장애를 설치하여 고수하는 것과 본질상에서는 같은 것이며 모두가 낡고 바르지 못한 모든 것에 끌려 정법을 교란하고 저애하고 있는 것이다.

협조를 잘하는 것은 정법시기의 대법제자의 심성의 자연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는 능히 자아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고, 정체적 기점에서 고려하여, 동수와 중생을 위해 책임을 지며, 그가 방출하는 것은 바르고 선하고 관용한 것이고, 사악이 절대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금강부동의 주념이며 동수의 정견과 그의 요구에 배합하여, 모두 무조건적으로 원용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모두가 능히 할 수 있거나 혹은 더욱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히 협조를 잘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우리가 협조를 말할 때 그저 한마디 말로 이러이러 하다가 아니라 매 사람이 정말로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자신의 심성에서 문제를 찾으며 그 지역의 부족한 점과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처사해야 한다. 우리들이 정체적으로 진정 바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간다면 능히 법의 체현을 볼 수 있거나 혹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정법이 우리들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종합서술:

위에 3명 동수의 심득 교류를 이번 좌담회에서의 총화로 한다. 목적은 벽돌을 던져서 구슬을 끌어내려는데 있으며 따롄의 전체 동수들이 현재 법을 실증하고 정체적으로 배합하는데 중시를 일으키려는데 있으며 동시에 또한 우리 협조를 책임진 동수들과 대법 사업을 하고 있는 동수들이 능히 따롄의 정체적인 각도에 우리들의 위치를 놓으며 우리들의 책임을 중시하기를 희망한다. 단지 자기 주위의 소그룹의 동수들에만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끌어가도록 바라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응당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가도록 힘써야 하며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자신을 제고하며 자신을 제고하는 과정에서 법을 실증해야 한다. 우리 따롄 동수들의 정체적인 역량으로 우리의 도시를 진정으로 법을 실증하는 환경으로 만들며 중생을 구도하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

따롄 대법제자

문장완성: 2005년 8월 22일
문장발표 : 2005년 8월 25일
문장갱신 : 2005년 8월 25일
문장분류: [제자절차]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5/8/25/1089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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