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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수련문제에 대한 나의 이해

[명혜망]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선생님과 동창들의 도움하에 기쁘게 대법을 얻었다. 비록 일부 대법일을 했었지만, 나중에 청원하는 사건 및 전국 각지에서 하늘 땅을 뒤덮을 듯한 대법을 박해하는 적색테러를 본 후, 두려운 마음과 여러가지 집착심이 생겨 이들을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명혜망에서 대법 일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 등등이 실린 것을 보고 나도 나의 일부 심득을 써내려고 하니 여러분들의 지적을 부탁드린다.

1. 두려운 마음에 대하여

어떤 제자는 사악한 낡은 세력의 파괴에 대하여 똑똑하게 인식하지 못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잘못 인식하였는데, 사실은 ‘지혜로 진상을 알린다’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없다’로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채식을 한다고 해서 부처 수련을 대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본 것은, 소위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한다면, 늘 이미 기타 집착심이 생기는 동시에 일과 수련에 교란이 생긴다. 그리고 자신 또한 안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는 상황 하에서, ‘두려운 마음이 없다’로 다른 방면의 집착심을 덮어버린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여, 일에서 다른 사람과 비기며 다른 사람이 적게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두렵고 ‘기세등등하게’하지 않는다고 남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수련에서 ‘시간이 모자랄까봐’ 두렵고 자신이 ‘누락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는가? 사람의 집착심은 너무나 많다. 대법일을 함에 있어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한 가지 두 가지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동화됨을 통하여 전면적으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잡는 바, 외재적이든 내재적인 것이든지를 모두 막론한다.

나는 이런 한 조의 제자들을 아는데, 그들은 외지에서 북경에 왔다. 주요하게는 전단지와 진상표어를 붙이는것이다. 시작에는 아주 잘 했는데 그러나 외부의 환경이 위험해지고, 동시에 구체적인 일에 빠져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잘 하지 못함에 따라 그들은 마음이 일치하지 못하게 되었다.(이는 사악이 빈틈을 제일 잘 탈수 있는 정황이다) 표현된 것은 어떤 사람은 무서운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마땅히 견정한 의지를 통해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회복하여 법 속에서 제고했어야 하는데 단지 무서운 마음이 있으면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전반 수련소조의 분위기는 점차적으로 ‘무서운 마음이 있다’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자’를 에워싸고 정체상에서 순정한 법공부를 더 한층 약화시켰다. 후에 고향에서 또 한 패의 제자들이 왔으며 몇몇 동수들은 베이징에 온지 얼마 안 되었고 아무런 경험이 없는 제자들이 나가 붙이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가슴이 아픈 일이다. 나는 이 예를 가지고 하나의 어떤 마음을 단순하게 버리는 것은 정법수련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극단으로 가면 도리어 마에게 빈틈을 주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어떤 제자는 두려운 마음을 없애면 용감해 진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버리고 나면 이지적이고 지혜롭고 자비로와짐을 체험하였는 바 동일한 층차 중의 다른 한면이 아니었다. 두려운 마음은 정이고, 용감 역시 정이다. 사부님의 모든 경서를 다 찾아 보아도 ‘용감’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 그것은 다만 속인이 우리가 집착을 버린 후 체현해낸 이지 지혜와 자비에 대한 평가일 뿐인 즉 우리는 이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 많은 집착심을 버리는 데는 모두 이러한 것으로써 우리는 법에서 제고해야 하지 정이나 관념의 한 면으로 다른 한 측면을 대처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용맹’, ‘용맹정진’을 제기하셨다. 나는 법공부 하는 중에서 자신의 집착을 발견하고, 또한 대법의 위력을 믿고 정념을 수립하여 집착을 버리는 것이 곧 용맹이라고 체험했다. 선생님께서는 《전법륜》 제 9강의 “깨달음”에 대하여 “우리가 가리키는 진정한 깨달음은 바로 우리가 연공과정 중에 사부가 이야기한 법(法), 도가의 사부가 이야기한 도(道)인즉, 수련과정에서 자신이 시달림에 부딪히게 되어도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수련과정 중에서 이 법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이 법에 따라한다면” 곧 용맹임을 체험했다.

동시에 사부님께서는 《길》에서 “수련이란 곧 어려운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지 간에, 사악이 미친듯이 박해하고 생사에 관계되거나 할 때, 당신이 여전히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에서 확고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인류사회 중의 어떠한 일도 수련 길에서의 행보를 교란할 수 없게끔 하기란 어렵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수련의 길에서 어떻게 곤란하더라도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고,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며, ‘견정하게 걸어나간다’면 이것이 곧 용맹이라고 체험했다. 용맹은 모든 집착심에 대하여 정진하여 제거하는 하나의 상태이지, ‘두려운 마음이 없다’가 용맹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2.아직까지 남아있는 집착심을 어떻게 정확하게 대할 것인가

‘두려운 마음’은 단지 수련 중의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측면이다. 매개 수련인의 몸에는 모두 집착심이 있지만 어떻게 집착심이 있는 상황 하에서 대법일을 잘 할 것인가? 나의 견해는, 우선 자신에게 집착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 집착을 마땅히 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부 집착은 표면에서 볼 때와 사실상 완전히 다르다. 예르 들어 위에서 말한 그 한조의 제자들 중 가장 큰 문제가 ‘두려운 마음’이 아닌 것이 확실하고 한 개의 건강하고 순저한 수련환경을 창조해 내지 못한 것이다. 직접 원인은 바로 법공부가 모자라는 것이 일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낡은 세력은 ‘집착을 제거한다’란 명목으로 직접 제자의 법공부를 파괴하고 이 기점이 파괴당하면 우리는 산산조각이 나 법공부가 없어지는데 무슨 수련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박해 속에서 요행 심리를 안고 감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한조의 제자들이 그 당시 주의력을 모두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는’ 위에 모은 것은 사실상 또한 법을 일방적으로 이해한 것이며 또한 낡은 세력의 교란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을 배웠던 사람들이 길을 잘 못 걸었던 것은 그들이 내려놓지 못한 집착심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집착은 또한 꼭 사악에게 공제, 이용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워싱턴 DC법회에서의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 관건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집착이 있으면 곧 틈을 타게 된다”는 것은 낡은 세력의 시도이며, 우리들이 타파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의 이런 사악한 배치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집착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생각한다면, 유일한 방법이 바로 법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들이 집착을 버리려고 생각하고 법의 위력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집착을 버릴 수 있다. 나는 ‘오직 법공부를 잘 해야만이 집착심을 버릴 수 있고, 오직 법공부를 해야 만이 집착심을 버릴 수 있다’는 법에 대한 하나의 가장 기본적인 바른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법공부를 홀시했고, 법공부를 등한시한 것은, 모두 내심의 바른 믿음(正信)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동요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제자들은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다’를 강조하고 사람의 방식에 따라 부딪쳤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비록 집착심이 있지만 대법을 믿고, 법에 동화되고, 바른 믿음을 단호히 하여 집착심을 제거하면, 똑같이 집착심이 있는 정황 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대법제자로서 정법 수련 중에서 마땅히 완성해야 할 일체를 완성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리고 정법수련을 통하여 이 사실을 실증했고 바로 근본적으로 낡은 세력의 ‘집착이 있으면 틈을 탄다’는 가짜 이치를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또한 사부님의 “보도(普度)”의 위대한 자비를 증실할 수 있는데, 그것은 비록 우리들이 현재 집착심이 있지만, 정법을 따라 간다는 것 만으로도 위대한 것이고, 사부님은 곧 제도해 주실 것이다. 사부님의 “일체 생명을 모두 선해한다”는 위대한 염원을 원융한 즉 그것은 사악이 배치한 박해를 받을 필요없이 우리는 높은 층차로 올라갈 수 있고 중생들도 몽폐 속에서 대법과 ‘최악의 인연’을 맺을 필요가 없다.

사람의 이 층차에서, 우리들은 진상을 하는 과정에서 속아온 중생들을 구원했고,그들을 도태(“멸”)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게 하였다. 아마 앞으로의 우주는 ‘성주괴’이고 다시는 ‘멸’이 사람의 이 한 층차의 체현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창조하였다. 이 각도에서 말한다면, 우리 몸에 아직 존재하고 있는 집착은, 도리어 우리들로 하여금 사부님의 자비, 대법의 위대함을 실증하게 하고 또한 제자의 위덕과 제자의 과위, 세계를 원만시키는 하나의 계기이다. 물론 이 일체의 전제 조건은 ‘정념을 견정하게 하고 절대 동요해서는 안 되다’이다. 《대법은 타파할 수 없다》

문장완성: 2005년 7월 28일
문장발표: 2005년 7월 29일
문장갱신: 2005년 8월 23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7/29/1072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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