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두 가지 수련문제에 대한 나의 이해

[명혜망 2005년 7월 29일] 일찌기 대학시절에 선생님과 동학의 도움으로 기쁘게 대법을 얻었고, 선생님을 도와 대법의 일도 좀 했었다. 후에 상방사건과 그 후부터 전국적으로 하늘 땅을 뒤엎을 듯 대법을 박해하는 적색테러를 보고는 마음속에 대법을 회피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언제나 대법에 대해 신앙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명혜망에 오른 대법사업 중의 경험과 체험 등을 읽으면서 나도 나의 심득을 써내고 싶어 이렇게 써 내게 되니 여러분께서 바른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1. 두려워하는 마음에 관하여

어떤 제자들은 사악한 낡은세력의 파괴에 대한 인식이 청성하지 못하여 ‘두려운 마음이 없다’를 마음대로 종횡 무진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실제상 ‘지혜로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것’에는 ‘두려운 마음’이 포함되지 않는다. 바로 채식으로 부처수련을 대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본 것은 편면적으로 소위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을 것을 강조한다. 이미 산생된 기타 집착심은 사업, 수련에 대한 교란으로 늘 나타나고 있으나 안으로 찾으려 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기타 방면의 집착을 덮어 감추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당신이 붙잡힐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없다고 하지만 사업상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보노라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일을 적게 했다고 하거나, 한 일이 기세 높지 못하다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는가? 수련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거나 자기가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는가? 사람은 집착심이 너무도 많다. 대법사업이 하는 요구는 한 두가지 집착심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법에 동화되면서 외적인 것이나 내적인 것이나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외지에서 베이징에 온 어떤 조(一組)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주요하게는 전단지와 작은 쪽지들을 붙이는 일을 하였다. 처음 시작은 아주 기세 좋게 했지만 후에 점점 환경이 험악해 짐에 따라, 동시에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제대로 잘 하지 않았고 마음이 잘 뭉치지 못함에 따라(이는 사악이 틈 탈수 있는 상황) 어떤 사람은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이때 그들은 응당 견정한 의지력으로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회복하여 법에서 제고해야 했었는데 두려운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수련 소조의 기분은 ‘두려운 마음이 있다’ ‘두려운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 문제만 둘러싸고 분쟁을 함으로써 순정한 법공부를 진일보 홀시하게 되었다. 후에 고향에서 또 한 무리의 제자들이 왔지만 갓 베이징에 온 몇몇 제자들은 아무런 경험도 없이 전단지를 붙이러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나는 이러한 예로서 단순이 어떤 하나의 마음을 버리는 것으로 정법수련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극단으로 나가면 오히려 마에게 틈탈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어떤 제자는 두려운 마음을 버리면 용감해질 수 있다고 여긴다. 기실 아니다. 나의 체험은 두려운 마음을 버린 후는(기타 집착심도 마찬가지다) 이지적으로 지혜와 자비가 나온 것이지 동일한 층차 중의 다른 일면이 아니다. 두려운 마음은 정이고, 용감 역시 정이다. 사부님의 모든 경서를 다 보아도 ‘용감’이란 두 글자는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집착을 버린 후 체현해 낸 이지적이고 지혜롭고 자비로운데 대한 속인들의 평가에 지나기 않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많은 집착심을 버림은 모두 이전 것으로서 법에서 제고해야지 정이나 관념의 한 측면으로 다른 한 측면을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부님은 여러 차례 ‘용맹’, ‘용맹정진’을 제기하셨다. 나는 법공부 중에서 나자신의 집착을 발견하였고 대법의 위력을 믿게 되었으며 정념을 수립하면 집착심을 버릴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용맹’이란 것을 체험하였다. 사부님은 『전법륜』 제 9강에서 ‘깨우침’을 말씀하실 때 “우리가 가리키는 진정한 깨달음은 바로 우리가 연공과정 중에 사부가 이야기한 법(法), 도가의 사부가 이야기한 도(道)인즉, 수련과정 중에서 자신이 마주친 마난에서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수련과정 중에서 이 법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이 법에 따라 한다”면 곧 용맹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사부님은 『길』에서 말씀하셨다. “수련은 곧 어려운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사악이 미친듯이 탄압을 해도, 생사고비를 넘을 때에도 당신이 수련의 이 길에서 확고 부동하게 걸어갈 수 있다면, 인류사회 속의 어떠한 일도 수련의 길로 가는 발걸음을 교란할 수 없다.” 수련의 길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면서 “견정히 걸어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용맹이란 것을 나는 알았다. 용맹은 정진하면서 모든 집착심을 없애는 하나의 상태이지 “두려운 마음이 없다”하여 용맹하다는 것은 아니다.

2. 아직도 남아 있는 집착심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할 것인가

‘두려운 마음’은 다만 수련 중의 하나의 집착이며 하나의 측면이다. 우리 실례들을 자세히 분석하는 가운데서 나는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련인마다 제각기 모두 집착을 갖고 있다. 집착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법사업을 잘 할 수 있는가? 나의 견해는, 우선 자신에게는 집착이 있으며 이런 집착을 버리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응당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떤 집착은 표면상으로 볼때는 이런 일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일이다. 예를 들면 우리 그 소조의 제자들의 제일 큰 문제는 명백히 말해서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건강하고도 순정한 수련 환경을 만들지 못한데 있다.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곧 바로 법공부를 잘하지 않았고, 낡은 세력은 ‘집착을 버린다’를 구실로 직접적으로 법공부하는 것을 파괴하였다. 이 기본점이 파괴되어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법공부를 하지 않는데 수련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다만 박해 속에서 요행심리를 품고 고생를 겪을 뿐이다. 그 한 소조의 제자들은 당시 주의력을 모두 ‘두려운 마음을 버리는’데만 두었는데 실제로는 단편적으로 법을 이해하였고 또한 낡은 세력이 교란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을 배운 사람들이 틀린 길을 걷게 된 것은 바로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은 필연코 사악한 생명에게 통제, 이용당할 수 있다.” 『워싱턴 국제법회에서의 설법』 나는 “내려 놓지 못하는 집착”이 관건이란 것을 알았다. “집착이 있으면 틈탈 기회가 있다”는 것은 낡은 세력의 시도로서 우리가 없애는 것은 바로 이 사악한 배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집착을 인식하고 없애려면 법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집착을 버리려고 생각하고 대법의 위력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꼭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데, “법공부만이 집착을 버릴 수 있고 법공부만 하면 집착은 꼭 버릴 수 있다”를 인식한다면 이는 법에 대한 제일 기본적인 바른 믿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를 홀시하고 법공부가 생소해 지는 것은 모두가 마음 속으로부터 유이무이(有意無意) 중에 올바른 믿음이 동요된 것이다. 위에 제기된 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을 버릴’ 것을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사람의 방식으로 뚫고 나가려는 것이지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집착심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법만을 믿고 법에 동화되며 바른 믿음을 확고히 하면서 집착을 버린다면 집착심이 있는 상황하에서도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으며 대법제자가 정법수련 중에서 응당 얻어야 할 일체 성과를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정법수련을 통하여 이 사실은 이미 실증하였고, 낡은 세력의 “집착이 있으면 틈을 탄다”는 가짜 이론을 근본적으로 철저히 부정해 버렸으며 사부님의 “보도(普度)의 위대한 자비를 실증하였다. 우리가 지금 집착이 아직도 있긴 하지만 정법을 따라 가고 있다는 이 자체가 바로 위대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바로 제도하고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일체 생명을 모두 선해 시킨다”는 위대한 뜻을 원용시키고 계신다. 박해를 받아야만 높은 층차에로 오를 수 있다는 사악의 배치를 통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중생들도 미혹 속에서 대법과 “최악의 인연”을 맺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람의 이 층차에서 우리는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것을 통하여 미혹된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이 도태될 비참한 국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후의 우주는 ‘성.주.괴’일 것으로서 다시는 ‘멸’이 없을 것이며 사람의 이 층차에서 펼쳐 보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개척하고 있다. 이 각도에서 놓고 말할 때 우리 몸에 집착이 아직 있긴 하지만 도리어 우리는 사부님의 자비와 대법의 위대함을 실증하고 있으며 대법제자의 위덕을 수립하고 대법제자의 원만된 세계와 과위를 수립하는 계기로 될 것인즉 이 일체의 전제(前提)는 “ 정념을 확고히 하는 것은 절대로 동요할 수 없는 것이다.”『대법은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문장완성; 2005년 07월 28일
문장발표; 2005년 07월 29일
문장갱신; 2005년 07월 28일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7/29/107204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