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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 중의 장애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7월 23일] 대법제자들이 법공부 중 보편적으로 많든 적든 이러한 경향들이 존재하는데 바로 『전법륜』을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고 각 지역의 설법만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문제를 해답하는 중 가끔씩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서 법공부는 『전법륜』을 위주로 하며 기타 설법은 다만 보조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하셨다. 그럼 어떤 요소가 저애작용을 하고 있는가?

개개인은 생존하는 과정 중에서 모두 점차적으로 자신의 일련의 문제를 인식하는 이치가 형성되는데 이 이치는 통상적으로 끊임없이 보충되고 강화되며 승화된다. 사람들이 한 사물을 인식할 때, 만약 인정하고 좋다고 생각한다면 흔히 이 사물의 이치는 자신의 고유한 인식에 부합되어 공감이 생기거나 혹은 명석해지고 자신의 고유한 모호하고 천박한 인식을 깊이 파고들게 한다. 책 한 권을 보고 만약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다시 더 보려고 하지 않으며 더욱 자꾸 반복하면서 같은 한 권의 책을 보지 않는데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모두 이러하다.

대법제자는 법공부 중, 많든 적든 이런 경향들을 갖고 있다. 특히 자신이 “아주 이성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수련생은 이 문제가 몹시 돌출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고유한 사상 관념과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방법이 법공부 중의 장애로 되었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자아에 대해 철저하게 갱신하고 새로이 하는 과정이다. 대법제자가 수련의 길에서 능히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천 동력은 대법에서 오며, 대법제자의 법공부하는 기점도 마땅히 대법이어야지 자신의 고유한 관념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사상이 변이된 사람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람의 본질마저도 변화가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수련형식을 취하든 지를 막론하고 당신은 다만 모두 그가 의식한 것을 개변시킬 뿐이지, 도리어 그의 본질적인 변이를 개변시키지 못한다. ” ( 《북미 대호구 법회에서의 설법》)

자신의 고유한 인식에 의거하여 법공부 하고 이지적으로 인식하며 현재 문제를 대하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필경 인류의 문화는 정법을 위해 창립된 것이고 수련의 기점도 역시 가장 기본적이고 표면적인 도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인식도 역시 끊임없이 제고하고 승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가진 상태로 법을 접수한다면 아주 가능하게 자신의 수련에 수많은 누락을 남길 수 있는데, 이런 누락이 바로 자신의 이지가 의식하지 못한 요소가 조성한 것이다.

‘책속에서 무엇을 좀 보아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법공부 중의 장애이다. 법공부는 속인의 그러한 ‘이성화(理性化)’로 가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표면의 이성에 의뢰한다면 자신이 의식할 수 있는 부분만 개변할 수 있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은 개변하지 못한다. 이 부분의 물질 요소는 더욱 심층적이고 더욱 본질적이다.

법공부는 바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전법륜』을 위주로 하며 마음을 조용히 하여 대법을 통독해야 한다. 구하고자 함이 없으면 스스로 얻게 된다. 이 과정 중에서 당신이 의식할 수 있든 의식할 수 없든 지간에 일체 변이된 것, 바르지 않은 요소들은 자연히 바로 잡히게 된다.

오늘 이런 인식을 능히 써낼 수 있는 것도 자신은 역시 침통한 대가를 지불했으며 그 기간에 매우 큰 굽은 길을 걸었다. 써냄으로서 서로 힘을 내려고 한다. 부당한 곳이 있으면 동수께서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2005년 7월 21일
문장발표: 2005년 7월 23일
문장갱신: 2005년 7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7/23/1066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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