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5년 6월 21일] 나는 법을 얻은 지 1년 된 제자이다. 법을 얻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늘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배치하신 좋은 인연(善缘)에 감개가 무량해 진다……
사부님의 자비에 감개무량하기에 한편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더 일찍 대법을 수련할 수 있었는데 하는 회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교육자인데 아마도 98년 경에 있었던 일이다. 늘 싸움을 하여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 한 학생이 나의 사무실에 와서 놀았다.(학생들이 나를 무척 좋아한다) 이 학생이 말하기를 “선생님, 전 이제부터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당시에 나는 좀 놀랐다. “좋아. 자신이 다시는 싸우지 않기로 인식했다면 정말 좋은 일이야. 그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지.” 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또 “선생님은 제가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학생은 자신이 파룬궁에 대하여 깨달은 것을 간략하게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록 기쁘기는 하였지만 인식이 부족하였기에 그저 “네가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만 말하였다. 파룬궁이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았으나 어떤 방면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학생은 그 당시 아마 법을 학습한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나의 부정적인 관점을 듣고는 조급했지만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여 대법은 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99년 7월 20일 이후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던 이 학생이 불법적으로 잡혀 간 것을 알게 되었다. 후에 석방되어 나온 후 또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그 학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지금도 그 당시 그의 괴로워 하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하게 떠난 이후 다시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또 한차례 대법을 수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위대하고 자비로운 사부님(여기까지 쓰고 나니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고 계속 나에게 구도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인연을 배치해 주셨다. 2004년 나는 이미 소버짐(牛皮癣)이 심해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그 전에 나는 사업상의 일로 다른 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학교에서도 곧 바로 한 대법제자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대법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중앙의 결정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내가 접촉한 대법제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바르고 선량한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의문점을 풀고 내 병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고 『전법륜』—이 책은 출판당시에는 전국에서 판매량이 제일 많았고 지금은 오히려 중공에 의하여 금지된 책이지만 읽기로 결심했다. 나는 또 생각하기를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맹목적으로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무지했고 우매하여 수련할 기회를 놓쳤던 그 당시의 선택에 대해 가슴을 친다. 책을 몇 십 페이지를 읽은 후 나의 마음은 ‘쩐,싼,런(眞, 善, 忍)’의 진동을 느꼈다. ‘쩐,싼,런(眞, 善, 忍)” ! 우리들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쩐,싼,런(眞, 善, 忍)” 이라면 제창하는 것은 가짜(假), 악행(惡), 제멋대로(狂), 싸움(爭)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 정도까지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중국은 공산당의 지도하에 각종 재난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되어있다. 중화민족의 몇 천 년의 교육내용, 덕육영혼(德育靈魂)이 어떻게 이렇듯 중공에 의해 하루 아침에 변질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전법륜』에서의 초상적 과학과 철리의 깊은 논술은 내가 일생 동안 풀어도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풀어 주어 나의 두뇌는 갈수록 명석해졌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이틀만에 책을 한 번 다 읽었다. 나는 철저히 깨닫게 되었는 바 내가 마땅히 어느 것을 믿어야 하고 어느 것을 믿지 말아야 하는 가를 알게 되었다. 하마터면 생명 중의 제일 중요한 부분을 잃을 뻔한 것이었다. 나는 깊은 사유를 거친 후 견결히 대법을 수련하려고 결심하였다. 인식상의 제고는 신체 상의 변화에 기적을 출현하게 하였다. 불치의 병인 소버짐이 보름 사이에 기본적으로 완쾌되었다. 나는 대법의 신기함에 감탄하였고 공산당은 만악(萬惡)이며 사람들의 건강을 박탈하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이전에 대법에 대한 태도에서 심통한 교훈을 섭취했으며 만약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대법제자들이 중생을 구도하려는 선량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나의 후과는 어떠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매번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제자는 내심으로 사존께 큰 절을 올립니다!
후에 법공부를 중시하면서 대법의 각종 신기함과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의 몸에서, 수련과정 중에 하나하나씩 검증을 받았다. 나는 동수의 도움으로 재빨리 정법형세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자신의 부족한 점도 빈번히 폭로되어 나왔다.
진상을 말하고 법을 증실하는 중에서 나는 동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느끼건대 진상하는 것이 정치분위기 쪽으로 갈수록 짙어지는 것 같다. 그 날 저녁무렵 쯤 나는 돌연히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특수시기 대법제자는 특수한 수련형식이 있으며 진상을 말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것이 바로 특수한 한 방면이 아니란 말인가?
만약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하지 않았다면, ‘쩐,싼,런(眞, 善, 忍)” 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선량한 수련인들을 모함, 박해,기만하지 않았다면, 진상을 말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이런 특수한 수련형식이 나타나겠는가? 근본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이런 형식을 이용하여 진상을 밝히고 박해를 부정하며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세인들이 진상을 알고 구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오히려 그 무슨 정치분위기로 느낀 것이다. 대법제자의 탈당 행위는 바로 정치를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법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깨달음이 제고 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중에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자신 조차 감각하기 어려운 두려운 마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전법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거에 한 사람은 무척 애를 써서 나한(羅漢)으로 수련되었다. 그 사람이 정과를 얻어 나한으로 수련되었으니 그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삼계(三界)를 벗어났다! 이 기뻐함이 바로 집착심이고 환희심이다. 나한은 마땅히 무위(無爲)이며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는 그만 떨어졌으며 헛되게 수련했다. 헛되게 수련하였으니 또 다시 수련해야 되지 않는가. 또 다시 위로 수련하며 무척 애를 써서 또 수련해 올라가게 되었다. 이번에 그는 두려워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기뻐하지 말자, 기뻐하면 또 떨어질 것이다. 그가 이렇게 두려워하자 또 떨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두려움 역시 일종의 집착심이다.”
위의 설명은 환희심과 두려움 모두 집착심에 속하는 것으로 수련 중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마음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대법제자의 이런 수련 형식은 곧 바로 이런 두 가지 집착심을 철저히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전제, 독재, 악독한 당이 집정한 나라에서 대법을 배우고 하늘땅을 뒤엎을 듯이 요언의 선전과 악독한 모함 박해 중에서 우리는 악당에 의해 강제적으로 몇 십 년간 주입된 사악과 변이된 사상을 가진 중국인을 상대하여 진상을 말하며, 박해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도한다. 진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발도 개의치 않고 이렇게 진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최대한으로 두려움을 버리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우리는 박해를 부정한다. 우리는 박해를 제거하는 동시에 우리의 일체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건대 대법제자는 조그만한 두려움도 있어서는 원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수련환경, 수련형식은 능히 우리가 생생세세에 쌓았던 두려움과 각종 숨어 있는 집착심을 뿌리채로 뽑아버려 포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누락된 것이 없게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집착심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의 마음을 버리거나 혹은 남기는 것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다른 마음에 영향을 준다. 두려움을 잘라 버리지 못하면 이후의 환희심을 철저하게 버리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여기까지 깨닫고는 나자신에게 물었다. 그래 우리들이 응당 이렇게 깊숙히 숨겨져 있어 더욱 넓은 면과 연계가 있는 두려움을 버리지 않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중에야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착실히 수련하고 제자 자신에게 위덕을 수립할 기회를 준데 대하여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 내심으로부터 사부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탈당에 대해 ‘정치기분’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마터면 공산사악의 영체에게 빈틈을 탈 공간을 줄 뻔하였다.
사부님의 여러 차례 설법하심에 따라 우리는 더욱더 정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 사부님께서 근심하도록 하지 말자! 굽은 길을 적게 걷고 사부님과 대법을 견정하게 믿으며 작은 동요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수련해낸 자비심으로 더욱 많은 세인을 구도하자. 세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조소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성도 내지 말고 기가 죽지 말며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동시에 능히 이런 것으로 우리들이 수련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환희심, 두려움, 성을 내는 등등은 모두 우리가 버려야 할 집착심이 아닌가? 우리가 어찌 아직도 사람의 마음으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를 저버린단 말인가?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 한 우리는 못해 낼 것이 없다. 우리에게 인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버리려 하지 않는 집착심이 있을 뿐이다.
법공부한 시간이 짧아서 인식이 얕으니 많은 동수들과 함께 노력하면서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장완성: 2005년 6월 20일
문장발표: 2005년 6월 21일
문장갱신: 2005년 6월 20일22:02:25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6/21/104526.html